걷기 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p261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향유인 보행은 현대성으로부터의 도피요 비웃음이다. 걷기는 미친 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질러가는 지름길이요 거리를 유지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다.
속담에서 오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첫걸음이라지만 그 첫걸음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그 첫걸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한동안 규칙적인 생활의 고즈넉함에서 뿌리가 뽑혀 예측할 길 없는 길과 날씨와 만남들과 그 어떤 다급한 의무에도 매이지 않는 시간표에 몸을 맡기게 된다.
한끼의 검소한 식사가 때로는 최고의 만찬보다 더 나은 것이니 그 포만감과 유쾌함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온종일 걷고 난 뒤의 허기와 달콤한 피로가 뒷받침하게 되면 별것 아닌 음식이 침을 고이게 하는 미식으로 변한다.
걷기는 사물들의 본래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일깨워주는 인식의 한 방식이며 세상만사의 제 맛을 되찾아 즐기기 위한 보람 있는 우회적 수단이다.
짐은 인간을 말해준다. 짐은 물질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인간의 분신과 같은 것이다. 공정한 관찰자는 짐을 보고 그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것,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장에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도보여행자에게는 신발이 전부다. 모자니 셔츠니 명예니 덕목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 다음의 문제다.
현대의 도래는 소음의 등장을 뜻한다. 어디선가 항상 휴대전화가 울려댄다. 우리 사회가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침묵은 기계의 고장, 기능저히, 트랜스미션의 정지로 인한 잠정적인 침묵이다. 그것은 내면성의 출현이라고 하기보다 기술의 조업 중지상태에 불과하다.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돋아난 쓸데없는 곁가지들을 쳐내고 그를 다시 자유로운 상태로 되돌려놓아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침묵의 자유)
충분할 만큼 예민한 청각을 갖춘 사람이라면 풀이 자라고 나무의 우듬지에서 잎이 펼쳐지고 머루가 익고 수액이 천천히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연금의 장소를 탐험과 명상의 장으로 탈바꿈시켜 가지고 그 장소에서 장기간에 걸친 미시적 여행을 시작한다.
걷는 경험은 자아를 중심으로부터 외곽으로 분산시켜 세계를 복원시키며 인간을 그의 한계 속에 놓고 인식하게 만든다. 그 한계야말로 인간에게 자신의 연약함과 동시에 그가 지닌 힘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걷는 경험은 가장 전형적인 인류학적 활동이다.
아스팔트에는 역사도 없고 이야기도 없다. 심지어 그 위에서 사고가 일어났다해도 자동차들은 그곳에 아무런 기억의 자취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버린다.
방문객 수가 연간 수천에서 수십만 명으로 증가했다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로를 만들고 기반시설을 구축한 결과 명상과 침묵의 장소들이 TV, 라디오, 오토바이, 자동차 등의 소음이 진동하는 거대한 캠핑장으로 변해버렸다.
관광산업은 희귀하고 소중한 여러 장소들을 소비에 내맡긴다. 그러나 그 결과 그 장소들은 본래의 아우라가 파괴된 진부한 공간으로 전락한다. 수백만 년 동안 자연에 내맡겨져 있던 아르슈에 마침내 진보라는 것이 도착했다.
소음에 길이 든 사람들에게 고요한 침묵의 세계는 결국 표적이 사라진 불안의 세계가 되고 만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딱 그쳐버리면 기분이 으스스해지기 쉽다. 그곳은 곧 엄청난 재난이 발생하기 직전의정지순간처럼 느껴져서 길갓집에 사는 사람들은 공연히 겁을 내며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순례자란 무엇보다 먼저 발로 걷는 사람, 나그네를 뜻한다.
길을 걷는 것은 때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우리를 만들고 해체한다. 여행이 우리를 창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