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다. 왕보. p421
신선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장자의 재발견
“더러운 개울에서 맘껏 즐겁게 살지언정 군주의 속박은 받고 싶지 않다”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문명사회 속에서 살아야 했고, 사회와 정치권력의 모순을 비판하면서도 그 사회를 떠날 수 없었던 인간 장자. 신선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었지만, 그가 추가한 삶에는 이 사회를 완전히 떠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신선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고자 했다. 다만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무언가에 속박되어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먼저 자신을 건사한 다음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덕은 명성을 드러내려는 데서 파괴되고, 지식은 다툼 가운데서 생겨난다. 명성이라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고, 지식은 다툼의 도구이다.
이 두가지가 흉기로서 자신의 행위를 훌륭하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너는 덕이 높고 신념이 강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꿰뚫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명성을 다투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인의나 법도와 관련된 말들을 포악한 사람 앞에서 기를 쓰고 말할 테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추함을 드러내 자기를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을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부른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 반대로 남도 반드시 그에게 해를 끼쳐 보복할 것이다. 너는 아마 다른 사람에게서 해를 입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면서 세상을 구제하려는 자가 직면하게 될 상황인 것이다.
그가 또 어린아이가 되면 그와 함께 어린아이가 돼라. 그가 또 스스럼없이 행동하면 그와 함께 스스럼없이 행동하라. 그가 또 거침없이 행동하면 그와 함께 거침없이 행동하라. 그렇게 통달하게 되면 아무 탈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목표를 정해 놓고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고정된 틀로 자신을 속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아무것도 굳게 지키는 것이 없고, 어떤 외재적 변화도 나의 내재적 마음을 동요하게 할 수 없다. 나의 마음은 비어 있고, 이 때문에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심재-무심으로 가는 길
왜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유심, 즉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시비와 선악으로 가득 차 있다…그래서 장자는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다. 또한 자기의 시비와 선악의 마음이 사라지게 해야 했다.
심재는 마음이 완전히 허정한 상태, 마음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귀로 듣지 말라도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라고 하면서 기로 들으라고 한다. 기는 빈 채로 사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에는 어떤 욕망이나 고집이나 편견 등이 없다. 그래서 따를 수 있고, 이 세상 속에 노닐면서 세상과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사실 기는 세계 만물을 하나로 통하게 하는 기반이다. 귀와 마음은 같지 않다. 오직 몇몇 소리나 사물만이 듣기 좋거나 마음에 들 뿐이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이는 분별이 있고, 집착이 있고, 충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것들이 부정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는 단계에서 우리 마음에는 외물이 있고, 지식이 있고, 고집이 있다. 기로 들으면 그와 다르다. 이때 마음은 기와 똑같이 텅 비고 담담해진다. 이것이 심재인데, 마음을 기와 같이 텅 비고 아무것도 없도록 바꿔 준다. 그래서 세상의 가운데 있으면서도 무심하게 변화에 맡겨 버릴 수 있다.
무식과 유심
허심의 상태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평판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시류에 따르는 어떤 고정된 틀도 없고, 어떤 집착해야 할 세상 구제의 방책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시류와 함께 바뀌어 가는 어쩔 수 없음뿐이다.
#쓸모없음-생명을 보전하는 지혜(무용지대용)
상수리나무 사수에 관한 우화, 쓸모없어(!) 수명을 다한 나무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이처럼 클 수 있었겠는냐?”
산의 나무는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다. 기름 등불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베이고, 옻나무는 쓸 수 있기 때문에 잘린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쓰임새는 알면서도 쓸모없는 것의 쓰임새는 알지 못한다.
공자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다”는 태도와 달리, 장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 안 하는 쪽을 선택했다…우리는 오로지 이 한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적어도 정치적인 세계 바깥에 생명의 세계가 또 있다.(생명의 철학)
#제물론
모든 구별이 성심을 따라 다 함께 사라져 버리면 온 세계는 어떤 갈라진 틈이 없는 것으로 바뀐다. “천지는 나와 함께 살아가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
“눈에 보이는 세상 밖의 사항에 대해 성인은 가만 놓아 두고 말하지 않으며, 세상 안쪽의 일에 대해서 성인은 대강 이야기하되 자세하게 따지지 않는다”
제물의 관건은 사실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마음은 비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거울과 같다. 만물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지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성심은 반대로 가득 찬 마음이다.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은 이 세계가 나의 방식에 의해 절단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가 있다거나 그가 있다는 것은 너도 너의 ‘나 자신’을 가지고 있고, 그도 그의 ‘나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나 자신’이 싸우고 충돌하고 마음을 졸인다.
그들이 마치 끈으로 꽁꽁 묶듯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그들이 늙어 가고 있음을 말한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마음은 다시 되살아나게 할 수 없다.
내가 있다는 것은 바로 구별이 있다는 것이고, 시비와 미추가 있고, 다툼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침 없는 다툼, 따지기, 충돌, 초조함 속에서 진정한 생명은 매몰되어 버린다.
세계가 성심으로 뒤덮이고, 이 때문에 각기 다른 ‘나 자신’으로 포위되고, 의견과 편견으로 포위될 때 모든 것은 가상 속에 휩싸인다. 이와 동시에 진실한 세계는 자취를 감춘다.
#몰아일체-옳고 그름을 넘어
똑같은 하나의 세계에서 뜻밖에도 이처럼 상반된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나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은 옳고, ‘남’은 글은 것이다. 모두 자기의 옳고 그름으로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비평한다.
세계는 세계이고, 만물은 만물이다. 원래 옳고 그리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각각의 사물에는 모두 나름의 특징과 용도가 있다.(잡초는 없다)
도라는 것은 실질이 있고 미더움이 있지만 무위하고 무형이다. 그것은 전해줄 수 있지만 받을 수는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스스로 자기의 뿌리가 되고 옛날부터 원래 있었다.(자연)
어떤 사람을 진인이라하는가? 옛날의 진인은 사소한 것이라고 거절하지 않았고, 이룬 것을 뽐내지 않았고, 일을 꾸미지 않았다…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다. 지혜가 도에 능통한 자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소요유
소요유는 사실 인간 세상에서 시작된 고된 여정의 종점이다. 이 여정에는 덕의 내적 충만이 있었고, 도의 드러남이 있었고, 지에 대한 있음이 있었고, 행위의 신중함이 있었고…이 모든 것들은 소요유에 이르기 위해 모두 반드시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먼저 걸어야만 비로소 노닐 수 있다
무위의 제왕
부부의 구별도 사라져 버렸고, 사람과 동물의 구별도 사라져 버렸고, 친소의 구별도 사라져 버렸다. 인위적인 모든 요소가 사라진 뒤 그는 가장 근본적이고 참된 상태로 되돌아갔다.
무지한 마음은 실은 바로 텅 비어서 아무것도 간직한 것이 없는 마음은 것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가 된다. 예를 들면 이름(명예욕)을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바로 이름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는다.
명예의 주인이 되지 말고,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마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밀고, 지식의 주인이 되지 마라. 몸으로는 끝없는 것을 다 터득하고 마음을 풀어 놓되 아무 흔적도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하늘로 받은 것을 남김없이 향유하되 이익에 눈을 돌리지 말고, 텅 비우기만 하라. 지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배웅하지도 않고 마중하지도 않으며, 따르되 간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을 맡으면서도 그로 인해 상처 입지 않는다.
游心於虛 유심어허
[장자]라는 책은 사실 하나의 편일 뿐이다. 이뿐만 아니라 사실 한 장일 뿐이고, 심지어 한 구절일 뿐이다. 그 한 구절은 바로 “텅 빈 곳에 마음을 풀어놓는 것游心於虛“이다. 이른바 통한다는 것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장자는 “천하를 통틀어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역시 [장자](내편)을 통틀어 하나의 구절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