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다다오 그의 건축 이야기
안도 다다오, 도발하는 상자(1986)
##상자수법에 대하여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
한 예로써 건축을 보게 되면, 도시 속의 맨션 등은 냉난방이 완비되어 있으므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1년 내내 같은 온도, 같은 기후 속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이것으로는 인간 본래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즉, 완벽하게 콘트롤 된 상태가 인간적이며 풍요로운 것인가, 그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현대는 ‘밝기’와 ‘편리함’으로 건축의 모든 것이 평가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인간의 생활공간이라는 것은 어둡고 지저분한 곳도 함께 있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
“확실히 신주쿠같은 부도심지역에는 생명력이 없어요. 맨얼굴로는 볼 수 없는 얼굴이라고 할까, 화장을 하지 않고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건물도 윤이 나고 장식으로 되어 버렸어요.”
“안도 선생의 작품은 자연 그대로지요.”
#균질화 되는 시대의 건축
일반적으로는 건축가가 일을 하는 경우, 지식을 기술화하고 그것을 콘트롤 하면서 표현해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내 경우는 몸과 감성이 자신을 끌어 당기는 쪽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건축을 창작하고 있을 때는 매우 감각적이 되지요. 그와 동시에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가 깊어져서 항상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지식만으로 창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정직하게 만들고 싶은 그런 기분으로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와 부딪히게 되어 버리지요.
이 시대가 획일적이고 균질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며 교육도 생활도 유형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효율이나 기능이라는 면에서는 매우 양질의 로보트(와 같은 인간)가 가득 등장한 셈이여서, 그 나름의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떠한 테마 아래서 무엇에 구애되고 있는가 하면, 개인으로부터의 의견이나 표현이라는 것이 애매해요. 균질적인 데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는 인간적이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민가? 옛집의 다른 획일성? 어디가 다른지 말한다면 시간이지요. 그런 집에서 100년, 200년을 계속 살아요. 그런 시간 속에서 공간은 각각의 주인에 알맞은 모양이 되지요.
주거 공간이 옮겨 사는 것이라는 기분이 된 것 같아요? 현재의 일본인들은 지금 밀씀하신대로 점점 옮겨서 살아가기 때문에, 100년이나 200년을 일정한 장소에서 살지는 않지요.
신흥주택단지 ‘쓰쿠바 병’? 공간에서도 과거의 체험에 비추어 보아 아무것도 공감되는 게 없어요. 그러니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요.
지금의 신흥주택지라는 게 산을 깍고 강을 메우고 경사지를 정리하여 평지로 만들지요. 나는 그렇게 폭력적으로 자연을 파괴해버리지 말고,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힘과 같은 것을 되도록 끄집어내고 살려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교감할 수 있는 건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인간은 물리적인 것에는 쉽게 납득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자연과의 대화도 하여야 합니다
#록꼬의 집합주택 1983
#미를 창조하는 시인
이 어수선하게 다음에서 다음으로 쉬지않고 계속 소비만 되어가는 현대사회의 한 구석에서, 철두철미한 인간의 작품인 건축
#상자의 해체
#단순함과 복잡함
고시노 저택의 평면은 단순하다. 간단명료한 외관을 보면서 현관으로 이끌려 들어가 개방된 거실로 향해 계단을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건축의 내부에 대한 경험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복잡하다.
#비례와 리듬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도형의 복잡한 조작은 보이지 않지만, 발상의 최초부터 정4각형이라는 완결된 도형의 단위를 가산하여 전체의 질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 어록
건축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설계를 할 때, 이 말로 표현되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공간화할 것인가 하는 데에, 어떤 의미에서 설계자의 존재가 걸려있다고 생각한다.
도면이라는 것은 설계자의 언어이다. 나는 생활하는 면에서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과묵한 편이 좋다고 생각하므로, 도면에서의 ‘언어’도 그와 같이 꼭 완성시켜 보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생각같이 되지 않는다.
건축이란 경제, 기능, 기술이라는 이른바 필연적인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들에 형태를 더 해야 하는데, 설계하는 사람 쪽에서 논리를 초월한 체취와 같은 것이 강하게 끼어드는 것이다.
대지 안에서는 건물이 여백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건물은 여백으로부터 지배를 받게 된다. 건물이 자립해서 개성을 갖기 위해서는 건물뿐만 아니라 그 여백이 자신의 논리를 가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