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 소농(小農)

소농(小農)-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쓰노 유킨도. p211
녹색평론사

농업의 근대화 조건? 광대한 토지와 우수한 노동수단 확보? 이농인구…
풍요로운 농지를 만드는 것은 한 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영구농업?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고 표토(表土)를 지켜온 농업, 이것이 예기치 않게 환경보전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소농의 가장 근본적인 의의?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핏줄을 이어가고자 하는 바람(가문의 영속 보장)

농학? 화폐증식을 시도하는 업, 농업의 자본주의적 전개에 기여할 학문(기술학)
농학의 관점 속에는 살아있는 인간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소농이 열심히 지켜내려온 ‘뿌리박은 삶’은 바로 그들의 농업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그런데 과학기술을 응용한 생산성의 추구는 영속성이라는 소중한 특질을 현대농업에서 추방해버렸다.

“과학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하고 물으면, 주저없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지만 첨단과학의 산물인 무기를 보면 그 답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생산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자연을 파괴하는 흉기로 변한 농업

식량 수입을 위한 공업 제품 수출?

한 나라의 식량을 스스로 자급하고자 결의했을 때 취해야 할 정책은 분명하다? 인구 분산과 지역 활성화!

즐기면서 자급하는 농업, 겸업농가? 주5일근무, 정보화 사회의 이상적인 삶?!

농업은 인간에게 편안함을 준다. 거기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를 탐색하는 것도 농학에 부과된 커다란 역할이라 생각한다.

#한 점을 응시하는 토착 소농민
전정가위와 할아버지의 패전 예측

“농사꾼이 사용하는 도구에 이런 정도의 좋은 강철을 사용하는 나라라면 무기도 일본 것과는 비교가 안될거야.”

2차대전 개전 당시에 어떠한 국제적인 정보도 접할 수 없었던 시골의 일개 늙은 농부가 어떻게 여론과 다르게 일본의 패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까? 토착 소농민은 주변의 사소한 것을 새삼스레 관찰하면서 스스로 생각해 나간다. 권력기구가 유포하는 정보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몸을 지키는 지혜를 굴린다. 이것은 뿌리를 내리고 살기를 바라는 농민의 본능이다.

근대국가의지, 상공업 중심 산업국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가능성이 낮은 생업은 모두 폐기될 운명에 놓였다. 어부는 자식이 중학교에 가면 어부의 감각을 키울 시기가 없어진다고 탄식한다. 마찬가지로 소농의 자식이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우수한 인재가 이농하는 것을 의미한다.(학교를 넘어서)

#대농을 지향하는 ‘국민적 농민’
국가가 목표로 하는 농업정책? ‘돈을 더 많이 번다’(가장 손쉬운 방법은 규모확대)
통계에 없는 ‘비국민적 소농’

규모확대의 주 공급원? 등 떠밀린 이농!
기업가적 능력? 기업적 감각은 철저한 합리주의에 입각해서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는 정신이다
생산성 향상? 규모확대와 단위수확량 증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로, 규모의 확대 선택(이농으로 성립된 규모확대)

***수확량이 많다는 것은 태양에너지를 많이 고정시킨다는 것을 말한다(대부분 수분증산에 사용, 태양에너지 고정효율 상한선 3%,감자류)

본래 대형농기구 사용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미국식 vs 동양)

논에는 방대한 노력이 축적되어 있다. (선조에서 자손에 이르는 시계열 분포의 전체값, 경제개념과 범주와 크게 다르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소농에게 농지는 조상의 무덤이면서, 동시에 향토에 토착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이다

#소농의 얼굴을 지워버린 농협
현재 농촌사회는 아주 혼란스럽다? 가치관 , 윤리관이 근본부터 허물어진 듯하다!
콩세알의 심성? 지금은 어떤가. ‘장애물’은 농약으로 모두 죽여버린다는 식이다.
붕어나 미꾸라지가 사라진 수로? 분명히 쓸데없는 살생이다
농약 듬뿍 살포한 채소 출하? 먹는 것은 무농약!

이미 농업은 ‘생산이 곧 선‘이라는 세계에서 ‘생산이 곧 악‘이라는 세계로 전락한 듯하다.

유통마진을 가로채는 농협? 안전식품의 거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신뢰관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뢰하는 것은 A씨의 인격이 뒷받침하는 농산물이다.(얼굴있는 먹을거리)

***보조금이 인심을 타락시켰다
보조금에 으레 따라다니는 ‘술’을 얻어마시면서 ‘교제’하고 ‘표’를 움직이며, 보조금을 내세우면서 표를 모은다
‘국가의지’로서의 농업은 대농의 방향? 그것은 결국 소농을 죽이는 방향이다!

아름다운 바다 속 산호 풍경 이변? 사탕수수 재배 장려금이 원인? 사탕수수밭에 뿌린 제초제가 진범으로 판명되었다
제초제 추방하기 위한 지혜? 사이짓기와 손 제초!

농촌의 지도자상? ‘화폐를 초월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철학을 가진 사람

#소농은 풍토를 살린다
풍토? “풍토는 그곳의 대지와 대기의 접점에서 빚어진 순자연산물이다. 따라서 가격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극히 가치가 높은 것이다.”

논과 농가의 인연을 끊는 것? 대규모 농가 육성 국제경쟁력 강화 정책!
소농을 망하게 하는 농업연구? “귀하의 농지는 무슨 성분이 몇퍼센트 부족하다”고 화학적으로 설명하면, 그 성분을 함유한 비료를 뿌리고 싶은 것이 사람마음이다. 지도한 쪽은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금도 확인하지 않는다. 효과가 없었다는 시험결과는 숨겨두고 효과가 있었다는 사례만을 전적으로 맹신할 뿐이다.
농가는 자신의 토지를 지키려면 이것을 거부해야 한다? 악덕의사가 약을 난용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자재를 찾아 농가에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태어난 곳에서 일하며 살고 싶다고 절실하게 원하는 농민의 감정을 자신의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나는 현장을 알고 있다”고 으스대서는 안된다.

풍토산업에 의한 지역진흥의 목적은 사람이 태어난 지역에서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풍토는 어디까지나 자연물로서 평등하며 좋은 풍토, 나쁜 풍토의 차별이나 서열은 존재하지 않는다(자연과 인위의 조화 추구)
***자연순응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또한 개선방안 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합리성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풍토품종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상품작물과 자급작물의 차이? 풍토에 맞지 않는 품종을 재배하기 때문에 농약을 다량으로 뿌려야 되는 인과관계를 소비자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내 고장의 농업’이 아니라 ‘이 논의 농업’을
‘일촌일품(一村一品)’이 아닌 ‘일촌백품(一村百品)’? ‘한 마을에 백가지 명품’ 운동!

농촌기술지도, 농협 등이 전부 얽혀서 ‘공업제품의 판매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간의 에너지를 축적함으로써 오늘의 농지가 구축된 것이다
선조들이 해온 그대로 땅에 에너지를 비축하여 그것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경제성 추구’에 매진한 결과?
풍토무시-화학비료-병충해 저항력 저하와 연작-선충의 피해가 아주 심해졌다

“풍토활용은 향토에서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애니미즘? 생명과 영혼이 깃든 자연계의 모든 사물!

고유의 미의식인 청정미가 넘친다? 경영내용이 뛰어난 농가의 논밭은 작물의 생육상태는 물론 그 주변이 아름답다!

“농지는 인공의 자연이다”
자연계의 특징? 스스로 비료를 준다!
다양한 종의 공존은 결코 토양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생명의 윤회, 순환)

경제적 합리주의에 일관된 농경은 생산성 향상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략을 강요하고 있다

빼앗은 영양분의 대부분을 토지에 되돌려주지 않으면 지력은 점점 약해진다(생태순환의 연결고리? 똥)

자연자원의 파괴에 대한 책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빈곤을 만든 사회체제에 있다. 많은 저개발국에서는 화학비료와 농약의 다량 사용으로 수확증대가 기대되므로 국가로부터 많은 보조금이 주어지고 있다!(허울뿐인 세계화)

농경의 역사가 인류에게 주는 교훈은 농지를 덮고 있는 표토에서 유기물을 잃을 때, 거기에서 살고 있던 사람도 자연과 함께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표토의 유기물 함량을 유지해가면서 수백년이나 식량생산을 계속해온 집약소농의 활동이 실로 예기치 않게 지구환경을 지켜온 것이다.

‘농업근대화’는 소농이 농업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아시아적 정체사회? 서구적 역사관!

“나는 도시의 발달이 인류와 세계에 대해서 불행한 악이라 생각한다…”

간디는 이미 오늘의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무정부 농경사회’의 이상향!(소국과민小國寡民)
새로운 시각? 농업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적합한 생업형태!

마을공동체에서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소농민에게 국가기구는 의심할 것 없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지겨운 존재였다(농민수탈과 소농의 생존기반 파괴)

노동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기술? 자급자족
반드시 화폐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농에 있음이 틀림없다

마을이 사라진다? 양심이 사라진다? “생산이 곧 악”인 죽임의 농업!
“제초는 완전하지만 웬지 나쁜 짓을 한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일? 출구 없는 미로
농약사용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사바나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다(불필요한 살생)

수입농산물로부터 농업을 지키는 방법은 무농약 농산물을 생산하는 길 이외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먹을거리를 찾는 소비자, 농산물의 장거리 수송에 농약은 필수, 대규모 기계화 방식의 농업에 화학비료와 농약은 필수(공업화된 농업)

휴일에만 하는 일이지만, 아무튼 일년 정도 힘든 육체노동을 계속하는 사이에 10년 동안 괴롭혀온 요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고된 노동이 아닌 즐거움?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진짜 채소 맛!

가능한 한 자연에 거역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체험은 우리를 애니미즘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눈뜨게 해주었다

농지를 황폐하게 만드는 과학적 농법?
과학도 일종의 신앙이다? 오늘날의 과학적 진리는 내일의 미신일지도 모른다(사라진 과학의 탐구정신? 의구심에서 비롯된 호기심, “모든 것을 의심하라”)

전통 자급농업이 근대화의 파도에 휩쓸리며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어느 나라에서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농업 본래의 자연권이 국가에 의해 박탈당했다(전복적 이성)

논 제초제로 미꾸라지가 사라진 논? 그것을 우려하는 농민을 만나본 적이 없다!
점자리나 니꾸라지를 다시 돌아오게 하자!

인위의 과학농법, 무위의 자연농법
무위자연의 활동은 대우주의 의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표토와 토양유기물을 지키고 있는 지구 지킴이, 소농

수출을 위한 ‘환경농업’? 이미 환경농업이 아니다
생태적 지속가능한 농업의 실천방법은 가족형 소농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21세기 희망은 農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정보화사회에서 소농의 바른 자리찾기를 모색하며 할 시기이다…대형농업의 자본주의적 발전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조개선책’은 하루빨리 폐기해야 한다.”

이 나라에 넘쳐나는 농업전문가(공무원 , 연구자, 교수,..)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들 중의 한사람인 약자도 너무나 부끄러운 심정이다.

농업중심의 순환사회가 아니고는 장기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기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어린시절 할아버지 이야기 교훈?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군사국가이며, 국가기관이란 결국 민중을 착취하기 위한 정치라는 것을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으로 땅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국가와 국가기관의 선전과 수사에 쉽게 설득당하는 것은 이른바 계몽된, 교육받은 사람들이기 쉽다(일본은 신국이기 때문에 최후에는 신풍이 불어서 부정한 나라 미국을 반드시 패퇴시킨다고 가르친 선생과 ‘애국소년‘)

인류사회의 진보, ‘친환경 개발’? 자연을 죽이는 기득권자들의 상투적인 속임수

이러한 땅에 뿌리박은 자주적 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진보라고 믿는 어리석은 미신에서 지금 우리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김종철,녹색평론 발행/편집인

전복적 이성 | 인간해방

전복적 이성. 워너 본펠트. p357
State, Capital, and Class: On Negative and Subversive Reason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 국가, 계급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사회는 갑자기 순식간에 야만 상태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너무나 많은 문명, 너무나 많은 생존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이 있기 때문이다…부르주아 사회의 조건들은 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부를 포용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사회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을 부득이 파괴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하고 그 시장들을 더욱 철저히 착취함으로써.

국가는 부르주아 집행위원회
이 책은 자본이 그 형태가 무엇이건 간에 근본적으로 착취관계라고 주장한다
국가 형태는 대다수의 인구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분리가 자본과 그 정치적 형태-즉, 국가-가 의존하는 사회적 기초이다.
인간의 생산력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분리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인간화는 피억압자들에게는 결코 끝나지 않을 파국이다(착취로서의 부의 생산 없이는 부의 재분배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은 언제나 위기내재적 세계시장 관계들이다(자본이 어디를 가든 계급 갈등이 따라간다, 그렇다면 이제 자본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고도의 불확실성 시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복이 진실로 인간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인간 조건들의 부정은 전복적 이성의 정언명령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신의 말이 곧 법이라며 스스로에게 만족했던 아담과는 달리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전능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에 반항했던 이브의 이야기를 읽는다.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은 계급에 대한 부정속에서만, 계급 없는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긍정(성)을 발견한다.

전복은 사회적 지식과 상상적 의식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인간해방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실천적 이성으로 바뀌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무언가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니오’가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아니오’가 그것에 반대하는 사회에 외부적이지 않고 그와 동일한 사회 내부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은 계급을 위한 정치(학)에서가 아니라 오직 계급에 대한 부정 속에서만 자신의 해결책을 발견한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전환되면서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로 대체되었다’-[미니마 모랄리아],테오도르 아도르노

비판적인 사회이론의 임무는 경직된, 물질 같은, 응결된 관계들을 탈신비화하여 그것들의 직접성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판의 목적은 오히려 사회적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적 형태들을 해독decipher하는 것이다

개념이란 자신들의 형성을 요구하는 현실의 계기들이며, 모든 개념들이 비개념성들을 참조한다.

메타이론의 상술은 사회적 실존에 대한 이신론적인 개념화들이 가득한 ‘보이지 않는 손’의 교의와 유사하게, 무한회귀적으로 끝난다.
국가는 경제적인 것을 참조하여 설명되며, 경제적인 것은 국가를 참조하여 설명된다. 수요는 공급에 의해 설명되며, 공급은 수요에 의해 설명된다. 이런 악순환에 의해 설명은 동어반복이 된다.

물화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립된 것이 아니다.
가치는 ‘사물들의 관계로 표현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사회적 현상!)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사회적 현상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추적함으로써 그것의 사회적 내용을 해독하려고 노력한다.

거꾸로 뒤집혀져 있는 세계에서, 참된 것은 허위적인 것의 한 계기이다.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사유는 탈신비화함으로써 현실을 드러낼 수 있으며, 탈신비화는 인간 실천에 대한 이해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천이 본질적인 것이며, 사유의 목적은 전복적인 것이다.(탈신비화가 사유의 비판적 목적이다)

가치, 즉 인간의 값어치는 다른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매겨진 가격이다.

변증법은 사물들에 ‘대해서about’ 사고하지 않는다. 변증법은 사물들로부터 사고한다.
현상이란 본질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속임수를 부리지 않는다.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이다’
만약 전체가 그르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그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부정적인 조건들과의 화해를 꺼린다.

그릇된 친구들과 연대하고 그릇된 갈등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는 부르주아 사회의 허위에 대항하지 못한다. 도리어 그러한 연대와 참여하는 모든 면에서 허위를 강화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역사 이전’이며, 인간이 더 이상 착취의 자원이 아니라 목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인간이 창출할 때 인류사가 시작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칸트의 비판적 계몽과 공명했다.

인간의 실천은 경제적 객관성의 단순한 인격화인 자본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 반하여 존재한다.(마르크스의 비판의 핵심적인 ‘문제틀’)

독자적, 비판적 사유? 사유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서기를 감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블로흐

자본은 자신의 실체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을 전제한다

역사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모토? ‘모든 것을 의심하라!’ (de omnibus dubtiandem)

본질과 현상이 일치한다면 의심은, 그리고 그것과 함께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고 될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부정적인 조건들과의 화해를 꺼린다.
그의 비판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형태인 자본주의적인 형태의 신비성을 발가벗긴다

전도된 사회적 실존? ‘공동체’의 전도된 형태들로 존재한다, 개인들이 항상 서로 ‘개인들로서’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이 추상적인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한다!

본질이 인간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면, 사회는 인간 없는 세계로 변형된다

노동이 생산적인 것은 그가 자신의 반대, 즉 자본을 생산함을 통해서만이다

물화된 비인격적 관계들은 단지 환상일 뿐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무관심이다.

계몽은 매우 전복적인 일이다! 계몽은 사물의 외관(현상)을 의심하며, 세계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 세계를 뒤집어 생각한다.

정치경제학은 경제적 범주들이 마치 물질계 바깥의, 자연적인 사물들인 것처럼 다룬다

잘못된 예견들, 확정 불가능한 소프트 사이언스? 노벨경제학상은 폐지되어야 한다!-뮈르달
경제적 범주들은 비합리적인 세계의 합리성을 표현한다

#인간의 실천, 그리고 생산’되는’ 자본
‘인간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점점 그들을 예속화하는 현실을 생산한다
자본은 주체가 아니다.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의 규정적인 관계(양식)에 붙이는 이름이다.

설명되지 않고 단지 주장될 뿐이다
자본? 추상적 형태의 가장 보편적 부의 표현

사회적 적대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착취는 ‘전도된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노동의 소외를 통한 사회적 갈등에 의존한다

현대 장치경제학은 흔히 세계화로 표현된다
세계화는 일국적으로 고정된 ‘케인주의적 재분배’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권력이 헤게모니적 지위를 획득하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국익을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 매일매일의 활동은 전지구적 세력들에 의존, 사람들은 ‘복잡한 연계성’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에 휘말린다)
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지는 자본의 경쟁 논리로 인해, ‘국내경제들은 전지구적 경제라는 지각된 긴급성에 종속’된다

‘위기들’을 예견한 마르크스의 고찰
‘세계시장과 위기’에 대한 기획된 연구는 단지 그의 연구의 종착지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오히려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모순들이 작동하고 또 그런 만큼 그 모순들이 가장 구체적인 형상을 갖고 나타나는 결론에 해당한다.

대외무역 없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생각할 수 없다
‘화폐’는 세계시장에 도달하게 되면 자신의 ‘국민적 제복’을 벗어 버린다

간단히 말해, 세계시장을 창조하는 경향은 자본 개념 자체에 이미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것의 언어는 ‘가격’이며, 그것의 공동체는 화폐가 재현하는 추상적 부이다.

*자본은 태어날 때부터 전지구적 권력이었다
자본이란 비노동으로서만 자본이므로, 노동이 자본에 마주서지 않으면 자본도 자본에 마주설 수 없다. 자본은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노동의 사회적 성격은 교환 행위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며, 그럴 때 자본의 구체적인 물질성은 사라진다
자본은, 간단히 말해, ‘살아 있는 모순’이다. ‘인간 생산력’, 즉 부의 모든 발전은 대립적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의 목적은 이윤을 만드는 것, 국가는 이 목적의 정치적 표현이다(국가란 자본주의 국가다)

*신자유주의는 2008년에 분출된 위기로 그 자신의 뚜렷한 목적을 이루었다(생산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지배력)

트리클 업(trickle-up)? 서민층은 각종 부담만 지고 질적 이득은 상류층이 독식한다(비용의 사회화, 이윤의 사유화)

‘군사정부’의 목적은 피지배자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 고찰의 결과’이다-Friedrich

세계는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테러와 전쟁, 전쟁은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정의된다! 해방과 자유는 표면상의 해방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한된다. 속임수와 선전의 정치(학)는 거의 연극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사물들이 사물들과 맺는 관계라고 불렀다

인간 존재는 분리 불가능하다. 인간 존재는 무력과 폭력을 통하지 않는다면 생산의 경제적 요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이러한 분리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야 시민권이 부여되는 정치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분리의 논리’는 자본의 실재적인 발생과정이며,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은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행사를 게 입각하고 있다.(노동이 자신의 수단에서 분리)

정치경제학 비판은 경제학에 대한 만큼 정치학에 대한 비판이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코뮤니즘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대한, 인간해방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예견이다
코뮤니즘은 자본 및 그 국가에 대한 실천적인 비판이다
자유롭다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는 ‘공통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코뮤니즘은 노동계급의 실재적 운동이다
인간해방? 해방수단이 가장 결정적이다
수단과 목적이 대립? ‘혁명적 당’이란 생각은 형용 모순이다!

코뮤니즘은 사회적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추상으로부터 노동이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위기는 지도력의 위기이다’-트로츠키

***코뮤니즘이 제기하는 이슈? 권력을 잡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와 시초축적
노동수단의 노동으로부터의 분리가 [자본주의] 생산의 토대이다
‘상품’은 교환되고 ‘화폐’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앞당긴다

나는 자본의 최초의 폭력이 평등, 해방, 자유, 공리 등의 ‘문명화된’ 형태들을 형성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부르주아 ‘평등’의 실재적인 내용을 신비화한다.

인간해방의 이념이 아무리 단순해도, 그 목적과 수단을 고려한다면 그 실천은 가장 어렵고 불확실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인간해방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는 황금 열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완전고용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번영하는 걸 보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거 너무 빨리 성장한다고 말하며 우리가 가난해졌으면 합니다…”-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시아 전직 총리, 1997년 말레시아 금융위기 근본원인 평가

코뮤니즘은 ‘communis’를 의미, 이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다. 여기에서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기여하며,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받는다.

공정임금? 공정임금과 공정한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는 자본주의의 바로 그 ‘공정성’이라는 조건들에서 추상된다.
오늘날 미국에 나타나고 있는 출처분명의 많은 자본은 어제 영국에서 아동들의 피가 자본으로 전환한 것이다

전복은 단순한 체제 순응적 반란으로서의 혁명을 추구하는 대안적 엘리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노동을 지도하는 것이지, 노동의 자기해방이 아니다. 전복은 전면적인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진보는 재난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을 자유롭게 만든 더 거대한 노동생산성이 노동을 과잉인구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의 인간적 계급이, 처벌도 받지 않으면서, 다른 계급을 굶주리고 할 수 있는 자유란 공허한 기만이다

#이상주의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상상력 없는 이성은 괴물을 창조한다. 이성 없는 상상력은 불필요한 것을 창조한다. 상상력과 결합한 이성은 코뮤니즘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20세기는 비참한 세기였다? 20세기는 도그마들로, 우리로 하여금 차례차례 시간, 고통, 그리고 많은 불의들의 대가를 치르게 한 도그마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적 가치들은 추상적 정체성의 부과를 통해 파괴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자유롭다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향이 자본의 세계시장 사회가 정리되는 비인간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출발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다. 이상주의는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혁명은 부정의 과정이다

혁명은 다시 한 번 하나의 물음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문제는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의 선량한 공동체의 재발견이다!

텔레비전을 버려라 | 감각의 회복

텔레비전을 버려라. 제리 멘더. p344

맥루한은 우리에게 과학 기술의 함정을 간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인간과 전자매체와의 관계, 지구촌 조성 등을 고무하였가에 결국 과학과 신비의 통일을 지지하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경험의 대체와 획일화

폼 나는 광고쟁이? 이런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떤 공허함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자신이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나는 좋은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자연은 지겨워!”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섬뜩한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어느 순간 자연은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나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내 아이를 지키려면 TV를 꺼라)

광고? 나는 죽은 ‘행복의 이미지’를 조작해내는 사기행각을 벌여왔던 것이 분명했다.(정치적 각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깨달음)

광고 자체의 기능에 분노한 고세이지? 미디어 광고는 권력관계를 표현하다!
영향력 있는 미디어?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흑인고용 요구시위 편파보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로 여론 조성!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디어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했다

“언론의 자유는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전국적인 광고매체를 살 수 있는 광고주? 그야말로 상업적인 정보가 온 국민의 정신을 물들이고 있었다

정보 과잉은 지각을 돕는 것이 아니라 무디게 한다.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현대인이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교양과 가장 많은 정보를 갖추었다고 말하지만, 정보는 아직 잘 처리되지 있지 않다. 대중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그것은 환경의 일부가 되었지만 대중매체는 진실로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문화? 단 한 세기 동안 미국은 세상의 경험을 간접적이고 종속적인 경험으로 대체한 최초의 문화를 이룩했다!
텔레비전 화면은 결코 시청자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없다. 제한된 이미지를 사용하는 정도의 경험일 뿐!(압축/변질/왜곡)

경험의 획일화?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텔레비전을 통한 간접적이고 경험을 혼동, 독재 이상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맥루한이 간파하지 못한 미디어의 본질? 텔레비전의 양면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미디어에 의존하면 미디어에 의해 소멸된다? 언론의 주목을 끌려는 의도적 행동? 점점 난폭, 목적은 단순히 미디어의 관심을 끄는 것!

형식이 내용에 우선한다? 미디어의 환경이 빚어낸 텔레비전형 인간, 닉슨의 대통령 선거, (본질은 내용보다 형식이 우선한다)

생태학자, 인디언 집단의 메시지 홍보를 위한 20초 스팟 뉴스? 시청자들에게 남는 것이 없다! 결과적으로 도움이 아니라 해만 끼쳤다!
컴컴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미디어를 통해 얼마만큼 충실히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압축/생략/변질/왜곡이 필수!)

차는 인간의 활동영역을 확장시키지만 잘못된 길로 이끈다.-맥루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기술? 해결방법은? 전면적인 거부 뿐!
원자력 발전소를 인정한다면? 기술,과학,공업,군사적인 엘리트를 인정하는 것이다
기술의 존재 자체는 사회의 여러 국면의 존재를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광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텔레비전은 개혁될 성질이 것이 아니기에 만약 우리 사회가 건전한 민주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변화시키려면 텔레비전을 완전히 제거해야한 한다!
어떠한 민주적이고 잠재능력도 지니지 못했다

#지각의 차단
분유가 모유보다 좋다? 자동차를 차는 것보다 걷는 것이 좋다? 왜 이런 연구가 필요한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잃어버렸다!

#경험의 미디어화

모순투성이의 환경속에 살고 있으면서 우리는 진정 무엇이 진실이며 거짓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우리는 환경을 통찰하는 힘을 잃어버렸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전해준 것에 불과하다!

자연과 멀어진 소비 문화? 추상만 제공할 뿐, 느낌과 직접 경험을 빼앗아갔다

지각구조를 뒤흔드는 인위적 환경? 자연환경은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에 그 우선적인 자리를 양보한 지 오래다(도시 속에서 무감각하고 메마른 지각구조를 갖고 있나)

인간의 감각을 박탈하는 환경? 도시의 사무실 빌딩은 미디어화한 환경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연 그대로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각박탈? 유일한 흥미는 자극적인 것들 뿐!(56 가지의 눈이 있었던 에스키모, 도시환경은 자연환경의 다양성을 앗아갔다)
미디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위적인 세계를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획일적 이미지 주입)

#지식의 몰수
지식의 개념 자체도 변화? 미디어가 우리 지식의 근원이 되었다
자신의 경험을 의심, 자명한 것에 눈이 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자신과 자연과의 직접적인 경험을 분리, 상대적으로 과학적 기술체계의 진보만 가져왔다)

(독서와 같이) 지식습득 과정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소크라테스식 대화법)

지식이 전문가나 추상의 영역으로 몰입되고 있다-이반 일리치

병을 치유하기보다 병을 악화시킨다 전문의학? 의사들이 무기는 화학,제약기업에 기초를 두고 있어 자연적인 치료법을 분열시켜 버렸다

“제약회사들이 식물을 약용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인디언에게서 배워 약품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다시 팔고 있다”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고 인디언들에게서 ‘의약비밀’을 캐내고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

***미디어화하지 않은 환경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싼 모든 일을 알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사용해야만 했다

#추상적 현실 속의 삶
당이 제시한 거짓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진실로 굳어지는 것이다

##경험의 식민화

사실상 광고는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한 순간부터 새로운 불만족을 창출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구매란 시장 구조적으로 볼 때 구매한 순간부터는 더 이상의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광고는 규격화된 인간을 양산한다
미국은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발달된 나라다. 이는 우연히 아니라, 미국 경제구조의 당연한 결과이다.
생산성 극대화? 개별적인 사용만이 생산성을 최대한 올려준다(개인주의적 소비보다 공동체적 소비는 ‘덜’ 생산적이다?)
56개의 눈을 구별할 수 있는 에스키모의 감각은 현대 세계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자연과 단절되고 세계)

광고 자체는 하나이 전달체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매스미디어의 기능이며 목적이다! (텔레비전은 공동체를 파괴한다)

텔레비전 광고의 등장? 전국 광고비용 1000% 증가!
환상에 불과한 트리클다운?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신다) 균등한 소득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끝없는 성장도 불가능하다)
경제력 집중의 필연성? 오로지 대기업만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광고를 할 수 있다

##텔레비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영상 앞에서 사람의 가치는 빈 그릇에 지나지 않으며 텔레비전은 무의식의 영역에 영상을 심는 쓸모없는 기구이다. 영상이 쏟아져 들아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우리 자신을 영상에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을 줄이고 싶어요. 하지만 텔레비전을 계속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서 어쩔 수 없거든요.”

점점 세뇌, 몰두하게 되는 이유?
해독성을 알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통념을 가진 채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인간의 역할을 나약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의 매체인 텔레비전의 본질을 규명하고 싶었다!
사고와 신체운동의 약화/감격적 자극과 과잉행동
감각기능을 빼앗고 정신세계를 박탈하고 있다

#빛은 음식이다
자연광, 고대 이집트 시대의 신생아 황달 일광치료
빛이 바뀌면 세포의 구조도 바뀌고 인체의 질서도 변화하게 된다
사악한 조명? 인조광? 체질이 달라진다! (자연광 섭취가 필요)

“생명이 햇빛의 영향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들이 태양광선의 스펙트럼 구조에 의해 다양한 생리학적 반등을 일으키고 있다”

#텔레비전에는 영상이 없다? 인광물질을 내뿜는 작은 점들! 깜박거리는 flicker, 그림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인위적이라 실질적인 감각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영상조절능력의 상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현실과 조작된 영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4 텔리비전의 본질적 성향

텔레비전을 경영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내적 인식을 지휘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정보선택권을 넘겨주고, 그들의 시고구조 속에서만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지역에 가서 그들이 버리고 한 것만 본다.

텔레비전이 전달하는 것은 실생활이나 사진,영화보다 훨씬 제한된 범위이다.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
조용한 연설이나 접근하기 힘든 사건은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사건은 어느 프로듀서가 말한 ‘시각적 요소‘에 의해 설명되어진다!
감각에 대한 편견? 냄새,맛,촉감을 가진 정보는 전달할 수 없다

#본질을 제거하는 영상? 아우라의 붕괴? 텔레비전으로는 생명의 본질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텔레비전 프로듀서들의 본질이 그다지 요구되지 않는 대상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기술복제의 시대의 가짜 상품들)

죽은 것이 더 어울린다? 셈세한 것은 지루해할 뿐! 자극적인 전쟁 장면이 더 어울린다
시간과 장소의 분리? 미디어의 뉴스는 우리의 실생활과는 무관하다
정확성에 대한 편견? 제한 시간, 압축/억지 축소는 필수, 왜곡은 불가피!

“뉴스는 없다. 미디어가 있을 뿐이다.” 30초 뉴스? 내용은 모두 제거, 기껏해야 남는 것은 간단한 사건 개요뿐이다!

#기술조작

“정말 이상한 일이지. 텔레비전을 볼 때는 줄곧 지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보고 있게 되거든…어쨌든 계속 보기 된다구.”

기술조작은 거의 대부분이 ‘극적 순간’에 대한 흥미라는 인간감정의 본능을 이용한 것이다!
광고 1분당 20~30회/ 상업프로그램 1분당 8~10회/ 공영프로그램 1분당 2~3회 기술조작(클로즈업/줌 등 일상에서 불가능한 과다한 화면효과!)

사람들이 자신을 텔레비전 앞에 붙어 있게 하는 것이 진짜 재미가 아니라 기술조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며 그토록 넋이 빠지는 일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전쟁은 평화보다 텔레비전에 더 어울린다
폭력은 비폭력보다 텔레비전적이다
객관적인 것 취급? 복잡할수록 전달하기가 더 어렵고 거의 선택되지도 않는다
피상적인 것이 깊이 있는 내용보다는 쉽다

전통 의식 다큐멘터리? 1분동안 평균 10회 이상의 기술조작으로 삽입시킨 텔레비전을 통해서는 도저히 의식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전달된 정보는 것이 없었고 알맹이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본래 그 성격이 텔레비전에 어울리지 않고 텔레비전화되지 않는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억지로 정형화되고 사실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결론 텔레비전을 버려라

텔레비전을 제거하기 위한 첫걸음은 텔레비전을 제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마음으로부터 버리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불감증과 중독에 의한 의식의 마비? 경험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바로 각자의 ‘탈식민 의식’에 있다!
점진적 개혁? 무기 개혁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 (생태적 발상처럼 전복적 발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