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모색 | 감각의 상실 시대

20130430-064632.jpg

전환의 모색. 장회익,최장집,도정일,김우창.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세계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배려 없이 심화되고 있는 경쟁의 극대화, 발전과 성장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맹목적인 자기확장, 시장적 가치의 전면적 확산과 그로 인한 사회공동체의 해체와 같은 현상들은 우리가 목격하는 이 변화의 핵심적 특징들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응하고 그것을 더 큰 인간적 가치에 의해 통제할 수 있는 공동체적 능력을 급격하게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온생명 사상? 개별적 생명은 결핍을 가진 존재이며 다른 생명과의 상호작용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결이 안되는/ 만들어짐의 과정./ 꽃도/ 암꽃술과 수술로 되어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벌레나 바람이 찾아와/ 암꽃술과 수술을 연결하는 것./ 생명은/ 제 안의 결여를 안고/ 그것을 타자가 채워주는 것.”- [생명은], 요시노 히로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나는 민주화 이루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지난 20년간의 민주정부가 일반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확대에 실패했다!
민주주의 정부가 정서적으로는 급진적이고 이상주의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아무런 대안도 없이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확대라는 면에서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경제민주화 실패,경제는 삶의 문제)

“결국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많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열망-실망의 사이클을 반복해왔는데, 그것은 사회적 이슈의 확대를 향한 요구들이 분출하는 한바탕 소동이 지나면 곧이어 보수정당체제 안에서 협소한 정치개임이 복원되는 악순환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 제일 큰 문제는 우리가 온생명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생명은 느낌이 있어 소중하게 여기지만, 온생명은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솟아나기 어렵습니다. 머릿속에서는 그려지지만 마음에서 생겨나지 않으니까 실천으로 연결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에서 문학이 충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내용을 마음이 느껴지도록 연결시키는 작업이 문학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상대성이론, 상대성원리란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어떤 속도로 움직이면서 보든 자연법칙의 기본형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현상은 달리 보이지만 적절한 좌표변환을 하고 보면 결국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대성이론이 주는 교훈은 내가 하는 좌표변환 때 자체가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의견이 다르고 수많은 분쟁이 발생하지만 서로 마주앉아 좌표변환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많은 부분 해결되리라고 봅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렵다는 점인데, 이 점에 대해 아인슈타인 이상의 지적 작업을 수행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동안 경제의 어려움을 겪고 또 이를 극복하려 애쓰다보니까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인지를 잊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정년을 얼마 앞두고 조금 일찍 퇴직해서 지금 자유롭게 지냅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왜 그렇게 묶여 살았나 싶고, 지금부터 사는 게 진짜 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들은 직장을 떠나면 삶의 의미가 없어질까 두려워합니다. 할 일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 걱정합니다. 그런데 내가 일을 위해, 직장을 위해 살았던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일이나 직장이 아닌 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살아야 보람되고 만족스런 것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조그만 집을 짓고, 주위 산에서 죽은 나무를 끌어와 구들방에 불 때고 새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방에 누워 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이렇게 자연스러운 활동을 하니까 건강도 좋아지고, 밥맛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도시생활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너무 많이 잃고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민주정부에 대해 이상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잡는 것보다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대중독재?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독재’다
최근 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국민적 동의기반이 훨씬 더 강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정치는 정치의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이를 해결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의 전문가 ‘보고서 정치’? 보고서의 내용을 보더라도 굉장히 무책임하고 좋은 이야기들, 우리 햔실로부터 괴리된 서구의 모델이나 사례들을 짜깁기 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것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앞당기자’? 인터뷰 기자 명함 문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앞당긴다는 것이 도대체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삶에 질적으로 더 낫고 좀 더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거냐 라는 물음을 던질 때 박정희시대의 과거와 대면하고 박정희시대의 문제들을 청산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되물었습니다

왜 얼마전 까지만 해도 치대강령적이고 급진적인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가졌을 때 신자유주의라는 보수적 이념을 수용하고 일반민중의 생활이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눈을 감다시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저한테 상당한 수수께끼이고 뭔가 설명해야 할 대목입니다.

읽기의 역사! 무식의 발견’ 두고두고 무식을 발견하면서 산다는 건 보통 재미있는 일이 아닙니다

민주화나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 구호,이념이나 제도들이 구체적인 삶의 개선에 연결되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돈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고, 보통 사람들이 돈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공동체는 사회질서 속에 도덕과 자유의 사회적 필요를 다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문제삼을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들의 유토피아 | 허울뿐인 미래

20130427-081101.jpg
너희들의 유토피아. 김영종. p330

기존의 가치관이 모조리 뒤짚어지는 현대문명이 대한 통렬한 전복, (거꾸로 세상보기, 미래에 저당잡힌 현재를 되찾자)

#간디스토마 아기 코만도 이야기
자연 다큐멘터리 ‘파브르 곤충기’, 개미의 뇌를 장악한 간디스토마 기생충 이야기
간디스토마의 유충은 뇌를 놔주기라도 하지만 현대문명의 유충은 결코 그런 자비조차 베풀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 개미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현대문명 속의 코만도 유충의 정체를 파헤치고 벗어나기 위한 탐색을 위한 책)

당신의 가장 큰 욕망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아기 코만도를 문제 삼을 까닭이 없다. 그렇게 명확한 욕망은 아기 코만도의 먹잇감이 될 수 없다(끝없는 욕망의 쳇바퀴)

진보의 개념 자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인정의 욕구를 통해 조작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

당신의 뇌를 조작하는 ‘인정의 체계’? 당신이 아기 코만도의 조정에서 벗어나려면, 빙산의 일각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당신의 인식범위를 훨씬 넘어선 이 ‘인정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그마한 시작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아웃사이더가 되는 게 두렵겠지만, 용기를 내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시작하면 삶에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경쟁에서 초연할 수 있다(기쁨의 철학)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축제를 본 소감_예비체이Yei Bi Chai와 파우와우powwow
애니미즘은 다 알다시피 정령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원시신앙이다.
‘미개한 야만인종’의 삶, 진화의 말단에 위치한 유치하고 미신으로 가득한 종교? 원주민의 애니미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한 백인의 기록물!

우리 문명은 실패작이다. 논리적으로 결론을 어떻게 내리든지 그 문명은 한 사람의 백만장자와 백만명의 가지를 만든다. 그 문명의 재앙 아래 완전한 민족은 없다…우리는 백인들에게 인디언의 메시지, 즉 인간됨의 교리를 내어놓는다.

애니미즘은 제국주의가 전 지구촌에서 강탈한,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인류 대다수가 살아온 실제 삶이다.

#산조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산조는 형성의 미학, 문자 그대로 흩어져 있는(산) 소리를 한대 모아 어울리게(조) 만든 음악, ‘허튼 가락’, 선비나 양반이 하는 ‘장악-바른 음악’이라 했으니, 민중의 음악을 허튼 음악이라 한 것은 당연하다
현대화? 대체로 크로스오버나 퓨전, 사양음악과의 교배가 핵심!
산조정신의 예술가, 예술가는 제도권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제도권은 민중의 활력을 죽이는 곳이다. 예술가는 광대여야 한다. 광대는 본디 천한 출생이다. 그는 민중의 사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다. 그래서 광대는 익살을 부리고 분노한다.

민중의 활력은 광대와 함께 요동친다. 예술가가 천한 광대이지 않으면 민중 속에 흩어진 가락들을 모을 수 있는 열정과 힘이 나오지 않는다.

#소비시대의 미학
현대는 자아 속에 잠든 나를 깨우는 타자가 없는 세계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군사독재가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고 하면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그러나 내친 김에 더 이야기하면, 민주주의 이상으로 언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상과 제도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독재정권의 통제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공적으로 인식되지만, 통제가 내면화하면 모든 이에게 그것을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통제보다는 자기검열이라는 통제의 내면화가 자유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주역이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로 세계는 자가면역질환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가 자신을 공격해 자멸하는 것이다.

말을 통제하는 것은 곧 생각을 통제하는 것. 보도나 거래,계약,토론 등 언어생활의 공적인 부분은 ‘생각’이 아닌 ‘팩트’, 곧 ‘사실’을 요구한다. 팩트는 증명체계에서 근거로 작용한다…팩트와 증명에 의지하는 것은 ‘현재’를 살지 않겠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최근 예로 천안함 사태, 근거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하므로 지금 당장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않고 증명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증명작업은 언제나 뒷북을 치기 마련이다.
전문가의 말 앞에 주눅드는 세상, 자기 생각을 활기차게 표현하지 못한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말에는 생명이 없다.(펜이 칼보다 강하다! 말을 지배하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현대인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능력이 거의 폐인 수준에 가깝다. 팩트를 말하도록 길들여진 데다가, 팩트를 말하느냐 아니면 그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떠드느냐가 사회적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증명을 기다리는 어투’? “~인 것 같다” “~해 보인다” “~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논리적으로 하는 말은 대체로 자기의 말이 아니다. 지식에 종속된 ‘죽은 시인의 사회(말)’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존 로크는 언어의 가장 엄격한 사용을 추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저작은 ‘자연 언어’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구당 김남수 선생의 책,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보도 기피한다 언론! 기자들 스스로 기득권층이 되면서 합리성을 실현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다
장기놀이는 오직 장기 말을 가진 언론만이 노는 놀이다. 언론의 장기놀이는 이미 소시민의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보도와 유언비어의 차이를 사실과 일치 여부로는 구별할 수 없다. 그 둘을 지식으로 구별한다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 때문이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사람들은 보도의 형식을 믿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지, 내용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반드시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발언하다.

유언비어의 특징은 햔재성이다. 미래로 이월시키면 유언비어는 힘을 잃고 만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증명체계를 동원하여 사태에 관한 발언을 자꾸만 미래로 이월시키는 것과는 정반대다!
말의 현재성은 숙명적으로 권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살아 있는 소시민(민중)의 언론으로서 유언비어를 열린 자세로 대할 필요가 있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 때문이었다!)
헛소리 속에 진실이 있다?!
사건의 현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성을 사멸시키는 것이 ‘합리성의 메커니즘’인 반면, 현재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유언비어’다. 유언비어는 즉각적으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진실이 힘을 잃어버려서 결국 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현자는 유언비어다.

#용산참극과 파우스트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계하자.”
괴테의 원작에서 파우스트는 용산참극과 똑같은 사건을 저지른다, ‘나봇의 포도원’

분노는 커녕 미화된 파우스트! 이것이 고급문학계의 현실이자 현대문명의 자화상이다.

‘진보’라는 근대의 이념 안에 갇혀 있는 것, 여기에는 좌와 우가 없다. 만인을 위한 복지낙원을 위한 당연한 희생? 이것은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 추구하는 지고의 가치관이다
신자유주의 음모, 합리적 거래를 앞세워 용산 참극을 빚은 배후에 이데올로기가 있다. 사실 뉴타운 청사진은 파우스트가 그의 개간지에 부여한 의의로 가득 차 있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떼를 쓰다가 사고가 터졌다고 가증스러운 주장을 편다. 그런데 문제는 가해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뉴타운 사업을 파우스트의 복지낙원에 버금가는 선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란 생각과 믿음이 다 이데얼로기인데도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시민단체, 정당들이 이데올로기로 사회분란을 조장한다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몰아붙인다.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_그들은 언어 조작술로 성공하였다
‘언어에 대한 인간의 오해’에 기반한 ‘언어를 통한 조작’이 가능했기 때문
빨갱이야말로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들이 자기 존립을 위해 만들어낸 환영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 유령이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진보란? 더 나은, 다 많은, 더… (more교)
현대인은 진보를 ‘믿음’의 환영 위에서 ‘실천’하므로 자신이 ‘현재’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현대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현재를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그런 삶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 즉 진보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잡힌 사실은 돈의 메커니즘을 보면 잘 드러난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돈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가?
마법은 신용(미래의 약속)에서 일어난다. 돈은 신용을 약속한 종이쪼가리
재정파탄애 직면한 프랑스 루이15세를 구한 것은 금이 아닌 인쇄기였다(존 로의 지폐 아이디어)

[시대정신Zeitgeist] 다큐멘터리, 현대인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돈의 노예가 되었나
현대금융체계의 실체? 금본위제폐지, 돈은 빚(채무)에서 생겨났다(갚기로 약속하는 것, 이것이 돈이다!)
은행의 지불준비금제도는 사실 현대판 노예제도? 돈은 빚에서 나온다. 빚을 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빚을 갚기 의해 고용된다. 돈이 빚에서 생기는대 사회가 어떻게 빚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우리 통화체계에서 빚이 없으면 한 푼의 돈도 없다.”-연방준비제도 총재 머리너 애키스,1941년 9월30일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빚은 갚을 수 있으면 단 1달러도 돌지 않게 된다?
‘빚의 자가 생산 시스템(현대통화체계)’-이 완벽한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 그래서 임금노예가 줄을 서게 만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류 전체가 쳇바퀴를 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다.

현대금융은 바로 존 로의 구상에 기초한다. 그는 경제의 시간을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놓았다
신용의 본질은 현재의 위기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자본주의의 시간성은 기약없는 미래로 지불결제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
현재의 삶을 희생하는 현대인의 자화상? 노예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노예, 역사상 어느 노예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현재를 거세한 ‘역사의 진보’, ‘역사 속의 유토피아’는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과 궤를 같이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이 화폐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화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아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돈의 바깥에서 살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오직 신용의 붕괴를 통해서만 가능, 돈의 바깥은 신용의 바깥, 즉 ‘돈의 가치를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모세의 체계’(구약)을 파괴하기 위해 마구간/바깥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자, 병신, 거지, 과부’/바깥을 쉽게 말해 혁명세력으로 여겼다. 그러나 체계를 지키려는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 체계/세계자본주의의 바깥에서 예수가 태어난다면 어떤 활동을 할까? 가장 먼저 직선의 시간을 휘어서 원으로 만들 것이며, 그런 다음 손을 들어 ‘희망과 기쁨의 시간’을 가리킬 것이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은 다름 아닌 미래 없는 현재다. ‘지금! 여기! 기쁨!’이 그의 슬로건이다.
직선의 시간이 가리키는 ‘미래의 희망’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지구를 파멸시키는 최고의 악덕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멋진 언어로 무지무지한 악덕의 은폐한 채 빛나는 상아에 들러싸여 있다.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통화체계)-이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고 스펙을 더 쌓고 교양을 더 넓히고 몸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더 잘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여념이 없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더 잘한다는 것’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잘’인가?”에서 ‘무엇’을 신적인 섭리와 확신이라는 형이상학에 넘겨버렸다.

“나보다 더 사랑해”? 그러나 “돈보다 더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함을 본 적이 없다, 돈은 소용이 아니고 형이상학이다
더 잘 살기 위해 미래의 시간을 향해 깔린 진보의 레일

진보에 대한 비판은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바깥’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이며, 더 멀리 가면 문명의 바깥이다. 또한 인간이 바깥, 사회의 바깥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바깥이며, 나아가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자’ 세계의 바깥이다.

‘인간의 동일성’에서 출발한 사회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똑같다(평등하다)‘는 사고가 선험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품 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동질의 인간노동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운동권 학생은 사회가 선망하는 엘리트, 엘리트는 이 땅에서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0순위다. 계급상승을 통해 돈과 명예를 함께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전문가가 여론을 지배하기 때문이 운동권의 발언은 설 자리가 없다. 관념적인 주장만 있고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거주했던 ‘관념의 집’이 군사독재(천민자본주의)와의 투쟁에서는 성공했으나 대의민주주의(부르주아형 자본주의)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제는 전문가집단이 사회적 발언을 독점하고 사회의 진로를 주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엘리트 진보주의자들에게 가장 불가능한 일? 스스로 자신의 토대로 허물도 다시 태어나는 죽음과 재생의 과정

이길 수 없는 영원한 전쟁? 테러와의 전쟁? 거기엔 실제로 적이 없다! “있지도 않은 테러범들을 동굴에서 찾는 걸 보게 될 거야”(아론 루소와 니콜라스 록펠러)

실제로 도덕은 기득권자의 무기이다. 도덕성 시비의 파멸을 피하고 엘리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자리가 증명체계의 바깥이자 학문과 지식의 바깥인 세속성이다

세속성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핵심이다.(현재가 살아있는 세속)

대의민주제, 대의성이 자신의 존립근거로서 요청하는 것이 전문성이다. 사람들의 뜻(민의)을 무엇이 대표한다고 했을 때 그것에 전문성이 없다면 대표성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세속성은 문자가 아닌 말의 세계다…세속화는 대의민주제가 아닌, 저잣거리 또는 광장의 정치인 직접민주제를 지향한다. 세속화는 쉽게 말해서 광대정신이다. 광대는 풍자와 익살과 해학을 통해 관중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풍자 등 광대의 행위는 기본질서와 가치에 대한 격하이고 그 결과는 민중의 읏음이다….그런데 대중은 모범생이나 도덕 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파열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늘날, ‘학력/지식’으로 무장한 채 ‘증명의 의무’를 지고 자본주의와 싸우겠다는 것은 마치 자책골을 넣으려고 싸우려는 선수와 같다. 그럴수록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체는 풍성해진다.

#유토피아야말로 지옥이다
‘한 손에 총, 한 손에 성경’, 팍스로마나, 팍스브리태니커, 팍스아메리카나, 분란 없이 평화를 유지하는 식민지? 원래 그러하듯이 ‘평화 라는 단어도 어떤 목적으로 쓰이냐에 따라 이처럼 달라진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쯤 되면 몇백 년 뒤를 내다본, 미국의 국가 건설 마스터플랜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이 마스터플랜은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일 뿐 아니라 과거 백인들의 인디언 침략사이기도 하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 부제가 붙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책을 보면 전율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이룰 수 없는 미래의 공상’이 아니라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돈과 같은 것이다. 돈(빚/신용)은 현재 돌고 있지만,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현재를 살 수 없게 한다.

전쟁은 언젠나 평화를 명분으로 한다…한편으로, 세계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힘도 유토피아다. 시민들은 유토피아의 형이상학이 아로새겨진 돈(빚/신용)의 위력 속에서 하루하루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거대담론의 대상이자 일상이 문제다.
이 같은 유토피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유토피아에 박탈당한 현재를 되찾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유토피아는 미래의 천국을 빌미로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종교가 번성하는 토양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무생물은 잘못된 개념이다. 만물은 다 생명이다-은 현재를 산다!!!

현대는 타자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다? ‘아마존 정글 원주민과 식물(정령)의 소통 이야기, 합리적 지식’이 가로막고 있을 뿐, 그것은 ‘실재하는 세계’였다! 이 세계야말로 타자와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세계다. 이 ‘실재하는 낙원’을 미신이라고 해서 퇴치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유토피아를 향해 스스로 노예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을 어찌 지옥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사 속으로 동시에 역사 밖으로
언어를 이용한 상징조작이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농간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 자본주의도 이 농간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사회에서 대중은 점점 이기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게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극소수 지배자가 만들어낸 최고의 성과물이다. 대중의 이기심을 이용하지 않고는 대중을 이처럼 자발적인 노예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전방위로 대중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실 속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살려고 할수록 소시민들은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화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이것을 막지 않으면 시대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 된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태어날 후손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고 있다.

유토피아가 보여줄 미래의 모습? 전 세계의 인디언 보호구역화(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지구촌 감시체제(조지 오웰의 [1984년])/벌레의 삶을 살게 될 개인(카프카의 [변신])
지금이 유일한 마지막 기회? 극소수의 세계지배자들도 바로 지금 마지막 공정만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마침내 유토피아가 도래한다. 그것이 곧 종말이다! (허울뿐인 미래)

신영복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 오래된 미래

20130324-214127.jpg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신영복. p515

고전에 대한 관점이 중요하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다
당대 사회의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의식, 과거의 재조명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관점으로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바쁠수록 돌아가라?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온 근대화와 서구 문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하지 않는 불행한 문화!
동양고전의 관심?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동양고전은 오래된 미래?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해독되지 않는 피라미드 문자 vs 한자, 몇 천년 전의 기록이 마치 며칠 전 띄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 고전에 대한 관점이 중요, 과거를 재조명하고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 학술논문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

오래된 미래?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긴 모순어법(oxymoron)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비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라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차이보다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 특히 그 점을 경계해야 한다)

서양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과학과 종교 두 개의 축, 과학은 진리를,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
서양 문명의 결정적 결함? 과학과 종교는 서로 모순된 구조!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는 비과학적이다!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있다(동양적 구성원리는 인문주의)

서양의 ‘철학philosophy’은 지혜에 대한 사랑,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
길은 삶의 가운데 있고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 일상의 경험의 축적
서양의 진리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 도는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 동양의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 관계들의 총화! 유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의 통일체로서 최대의 개념을 구성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근대사회의 신념 체제인 자본주의의 성장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동양사상의 조화의 균형? 유가와 도가의 견제

#2 오래된 시와 언
미래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카피는 허구, 사이버 세계 역시 허상! 이처럼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즐거운 불편!)
서경의 무일편, 군자는 무일(편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무일사상은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길

#3 ‘주역’의 관계론
집집마다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그릇, 손 때 묻은 오래된 그릇,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 낸 틀

주역은 춘추전국 시대의 산물,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학실할수록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전개된 시기,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의 시대적 산물!

득위의 비결? ’70%의 자리’!
어울리는 자리?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서 그 터의 기가 건물에 눌린다(고층건물을 지기를 받지 못하는 건축,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만나는 주역 사상?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큰 복이라고 하지요!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이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미래’에 대한 잘못된 관념? 변화는 미래로부터 온다?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

군자불기, 그릇이 되지 말라?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 결코 인간의 논리가 못되는 것리지요!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독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화동론,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고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참된 지는 사람을 아는 것!(책을 읽기보다 사람을 읽어라!)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5 맹자의 의

여민동락, 여럿이 함께 하는 즐거움,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 ‘만남의 부재’,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이 없지요. 식품 유해 색소,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자와 얼굴 없는 소비자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담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한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만남이 없고, 관계가 없다.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 배려할 필요가 없다. 2차 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6 노자의 도와 자연

진정한 연대란 ‘노자의 물’, 하방연대입니다? 낮은 곳으로,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

노자의 정치론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른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어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네팔의 좌판, 헐값의 수공예품! 외환제도나 시장가격이란 고도의 수탈 메커니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 ‘소비가 미덕’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 상품 이외의 서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러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무지,무욕,무위)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방법론, 실천의 방식, 궁극의 목표는 ‘난세의 극복’,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은둔과 피세가 아닌 세계에 대한 적극적 의지의 표명(무위는 무행이 아니다)

노자의 철학은 ‘물의 철학’
만물을 이롭게 한다/다투지 않는다/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지배자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먹기 때문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 하방 연대,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비어 있음(무)’으로 인해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있음의 배후를 간과하지 마라.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 유의 배후로서의 무를 드러내는 것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 한 개의,상품이 있음(유)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소유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용이 되기 때문이지요. 노자의 역설입니다. 무소유의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 숨겨진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진보란 단순화이다”-간디
노자의 이상국가론? 소국과민

#7 장자의 소요
우물안 개구리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메뚜기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장자’ 독법?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는 것!
기계의 부정? 기계로 말미암은 인간의 비인간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

책은 옛사람의 찌꺼지입니다
목수의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말로 전할 수 없다!

나비 꿈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중국 사상사에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

사회의 혼란은 모두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겸치별란-겸애하면 평화롭고 차별하면 어지러워진다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거울에 비추지 말라)? 사람에게 비추라!

“절용이 미덕이다”
소용없는 물건의 생산!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는 사람들이 소용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

#9 순자, 유가와 법가의 사이

제자백가의 공리공담?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사회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 연기론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한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근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우민화의 최고 수준? 상품 문화의 실상을 직시하는 것에서 비판정신을 키워야 한다!
비판적 성찰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의 출발점!
동양고전의 독법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이해보다 성찰적 관점의 확립, 그러한 관점을 얻었다면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이 고전의 모든 언술을 버려도 상관없다. 고전 장구의 국소적 의미에 갇히지 않고 그러한 관점을 유연하게 구사하여 새로운 인식을 길러내는 창신의 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는 것이기 때문. 그것은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며, 동시에 내일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창의적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가슴이 두 손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 이성보다 감성을, 논리보다 관계를 우위에 두라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
상상력은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보지 않은 것?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이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식목자 곽탁타의 비법?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 가고 난 다음에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된다!(무위자연, 자연농법의 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