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의 유토피아 | 허울뿐인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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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의 유토피아. 김영종. p330

기존의 가치관이 모조리 뒤짚어지는 현대문명이 대한 통렬한 전복, (거꾸로 세상보기, 미래에 저당잡힌 현재를 되찾자)

#간디스토마 아기 코만도 이야기
자연 다큐멘터리 ‘파브르 곤충기’, 개미의 뇌를 장악한 간디스토마 기생충 이야기
간디스토마의 유충은 뇌를 놔주기라도 하지만 현대문명의 유충은 결코 그런 자비조차 베풀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 개미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현대문명 속의 코만도 유충의 정체를 파헤치고 벗어나기 위한 탐색을 위한 책)

당신의 가장 큰 욕망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아기 코만도를 문제 삼을 까닭이 없다. 그렇게 명확한 욕망은 아기 코만도의 먹잇감이 될 수 없다(끝없는 욕망의 쳇바퀴)

진보의 개념 자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인정의 욕구를 통해 조작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

당신의 뇌를 조작하는 ‘인정의 체계’? 당신이 아기 코만도의 조정에서 벗어나려면, 빙산의 일각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당신의 인식범위를 훨씬 넘어선 이 ‘인정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그마한 시작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아웃사이더가 되는 게 두렵겠지만, 용기를 내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시작하면 삶에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경쟁에서 초연할 수 있다(기쁨의 철학)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축제를 본 소감_예비체이Yei Bi Chai와 파우와우powwow
애니미즘은 다 알다시피 정령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원시신앙이다.
‘미개한 야만인종’의 삶, 진화의 말단에 위치한 유치하고 미신으로 가득한 종교? 원주민의 애니미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한 백인의 기록물!

우리 문명은 실패작이다. 논리적으로 결론을 어떻게 내리든지 그 문명은 한 사람의 백만장자와 백만명의 가지를 만든다. 그 문명의 재앙 아래 완전한 민족은 없다…우리는 백인들에게 인디언의 메시지, 즉 인간됨의 교리를 내어놓는다.

애니미즘은 제국주의가 전 지구촌에서 강탈한,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인류 대다수가 살아온 실제 삶이다.

#산조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산조는 형성의 미학, 문자 그대로 흩어져 있는(산) 소리를 한대 모아 어울리게(조) 만든 음악, ‘허튼 가락’, 선비나 양반이 하는 ‘장악-바른 음악’이라 했으니, 민중의 음악을 허튼 음악이라 한 것은 당연하다
현대화? 대체로 크로스오버나 퓨전, 사양음악과의 교배가 핵심!
산조정신의 예술가, 예술가는 제도권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제도권은 민중의 활력을 죽이는 곳이다. 예술가는 광대여야 한다. 광대는 본디 천한 출생이다. 그는 민중의 사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다. 그래서 광대는 익살을 부리고 분노한다.

민중의 활력은 광대와 함께 요동친다. 예술가가 천한 광대이지 않으면 민중 속에 흩어진 가락들을 모을 수 있는 열정과 힘이 나오지 않는다.

#소비시대의 미학
현대는 자아 속에 잠든 나를 깨우는 타자가 없는 세계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군사독재가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고 하면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그러나 내친 김에 더 이야기하면, 민주주의 이상으로 언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상과 제도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독재정권의 통제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공적으로 인식되지만, 통제가 내면화하면 모든 이에게 그것을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통제보다는 자기검열이라는 통제의 내면화가 자유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주역이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로 세계는 자가면역질환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가 자신을 공격해 자멸하는 것이다.

말을 통제하는 것은 곧 생각을 통제하는 것. 보도나 거래,계약,토론 등 언어생활의 공적인 부분은 ‘생각’이 아닌 ‘팩트’, 곧 ‘사실’을 요구한다. 팩트는 증명체계에서 근거로 작용한다…팩트와 증명에 의지하는 것은 ‘현재’를 살지 않겠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최근 예로 천안함 사태, 근거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하므로 지금 당장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않고 증명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증명작업은 언제나 뒷북을 치기 마련이다.
전문가의 말 앞에 주눅드는 세상, 자기 생각을 활기차게 표현하지 못한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말에는 생명이 없다.(펜이 칼보다 강하다! 말을 지배하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현대인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능력이 거의 폐인 수준에 가깝다. 팩트를 말하도록 길들여진 데다가, 팩트를 말하느냐 아니면 그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떠드느냐가 사회적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증명을 기다리는 어투’? “~인 것 같다” “~해 보인다” “~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논리적으로 하는 말은 대체로 자기의 말이 아니다. 지식에 종속된 ‘죽은 시인의 사회(말)’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존 로크는 언어의 가장 엄격한 사용을 추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저작은 ‘자연 언어’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구당 김남수 선생의 책,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보도 기피한다 언론! 기자들 스스로 기득권층이 되면서 합리성을 실현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다
장기놀이는 오직 장기 말을 가진 언론만이 노는 놀이다. 언론의 장기놀이는 이미 소시민의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보도와 유언비어의 차이를 사실과 일치 여부로는 구별할 수 없다. 그 둘을 지식으로 구별한다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 때문이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사람들은 보도의 형식을 믿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지, 내용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반드시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발언하다.

유언비어의 특징은 햔재성이다. 미래로 이월시키면 유언비어는 힘을 잃고 만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증명체계를 동원하여 사태에 관한 발언을 자꾸만 미래로 이월시키는 것과는 정반대다!
말의 현재성은 숙명적으로 권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살아 있는 소시민(민중)의 언론으로서 유언비어를 열린 자세로 대할 필요가 있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 때문이었다!)
헛소리 속에 진실이 있다?!
사건의 현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성을 사멸시키는 것이 ‘합리성의 메커니즘’인 반면, 현재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유언비어’다. 유언비어는 즉각적으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진실이 힘을 잃어버려서 결국 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현자는 유언비어다.

#용산참극과 파우스트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계하자.”
괴테의 원작에서 파우스트는 용산참극과 똑같은 사건을 저지른다, ‘나봇의 포도원’

분노는 커녕 미화된 파우스트! 이것이 고급문학계의 현실이자 현대문명의 자화상이다.

‘진보’라는 근대의 이념 안에 갇혀 있는 것, 여기에는 좌와 우가 없다. 만인을 위한 복지낙원을 위한 당연한 희생? 이것은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 추구하는 지고의 가치관이다
신자유주의 음모, 합리적 거래를 앞세워 용산 참극을 빚은 배후에 이데올로기가 있다. 사실 뉴타운 청사진은 파우스트가 그의 개간지에 부여한 의의로 가득 차 있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떼를 쓰다가 사고가 터졌다고 가증스러운 주장을 편다. 그런데 문제는 가해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뉴타운 사업을 파우스트의 복지낙원에 버금가는 선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란 생각과 믿음이 다 이데얼로기인데도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시민단체, 정당들이 이데올로기로 사회분란을 조장한다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몰아붙인다.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_그들은 언어 조작술로 성공하였다
‘언어에 대한 인간의 오해’에 기반한 ‘언어를 통한 조작’이 가능했기 때문
빨갱이야말로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들이 자기 존립을 위해 만들어낸 환영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 유령이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진보란? 더 나은, 다 많은, 더… (more교)
현대인은 진보를 ‘믿음’의 환영 위에서 ‘실천’하므로 자신이 ‘현재’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현대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현재를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그런 삶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 즉 진보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잡힌 사실은 돈의 메커니즘을 보면 잘 드러난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돈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가?
마법은 신용(미래의 약속)에서 일어난다. 돈은 신용을 약속한 종이쪼가리
재정파탄애 직면한 프랑스 루이15세를 구한 것은 금이 아닌 인쇄기였다(존 로의 지폐 아이디어)

[시대정신Zeitgeist] 다큐멘터리, 현대인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돈의 노예가 되었나
현대금융체계의 실체? 금본위제폐지, 돈은 빚(채무)에서 생겨났다(갚기로 약속하는 것, 이것이 돈이다!)
은행의 지불준비금제도는 사실 현대판 노예제도? 돈은 빚에서 나온다. 빚을 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빚을 갚기 의해 고용된다. 돈이 빚에서 생기는대 사회가 어떻게 빚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우리 통화체계에서 빚이 없으면 한 푼의 돈도 없다.”-연방준비제도 총재 머리너 애키스,1941년 9월30일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빚은 갚을 수 있으면 단 1달러도 돌지 않게 된다?
‘빚의 자가 생산 시스템(현대통화체계)’-이 완벽한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 그래서 임금노예가 줄을 서게 만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류 전체가 쳇바퀴를 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다.

현대금융은 바로 존 로의 구상에 기초한다. 그는 경제의 시간을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놓았다
신용의 본질은 현재의 위기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자본주의의 시간성은 기약없는 미래로 지불결제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
현재의 삶을 희생하는 현대인의 자화상? 노예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노예, 역사상 어느 노예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현재를 거세한 ‘역사의 진보’, ‘역사 속의 유토피아’는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과 궤를 같이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이 화폐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화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아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돈의 바깥에서 살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오직 신용의 붕괴를 통해서만 가능, 돈의 바깥은 신용의 바깥, 즉 ‘돈의 가치를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모세의 체계’(구약)을 파괴하기 위해 마구간/바깥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자, 병신, 거지, 과부’/바깥을 쉽게 말해 혁명세력으로 여겼다. 그러나 체계를 지키려는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 체계/세계자본주의의 바깥에서 예수가 태어난다면 어떤 활동을 할까? 가장 먼저 직선의 시간을 휘어서 원으로 만들 것이며, 그런 다음 손을 들어 ‘희망과 기쁨의 시간’을 가리킬 것이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은 다름 아닌 미래 없는 현재다. ‘지금! 여기! 기쁨!’이 그의 슬로건이다.
직선의 시간이 가리키는 ‘미래의 희망’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지구를 파멸시키는 최고의 악덕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멋진 언어로 무지무지한 악덕의 은폐한 채 빛나는 상아에 들러싸여 있다.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통화체계)-이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고 스펙을 더 쌓고 교양을 더 넓히고 몸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더 잘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여념이 없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더 잘한다는 것’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잘’인가?”에서 ‘무엇’을 신적인 섭리와 확신이라는 형이상학에 넘겨버렸다.

“나보다 더 사랑해”? 그러나 “돈보다 더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함을 본 적이 없다, 돈은 소용이 아니고 형이상학이다
더 잘 살기 위해 미래의 시간을 향해 깔린 진보의 레일

진보에 대한 비판은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바깥’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이며, 더 멀리 가면 문명의 바깥이다. 또한 인간이 바깥, 사회의 바깥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바깥이며, 나아가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자’ 세계의 바깥이다.

‘인간의 동일성’에서 출발한 사회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똑같다(평등하다)‘는 사고가 선험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품 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동질의 인간노동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운동권 학생은 사회가 선망하는 엘리트, 엘리트는 이 땅에서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0순위다. 계급상승을 통해 돈과 명예를 함께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전문가가 여론을 지배하기 때문이 운동권의 발언은 설 자리가 없다. 관념적인 주장만 있고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거주했던 ‘관념의 집’이 군사독재(천민자본주의)와의 투쟁에서는 성공했으나 대의민주주의(부르주아형 자본주의)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제는 전문가집단이 사회적 발언을 독점하고 사회의 진로를 주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엘리트 진보주의자들에게 가장 불가능한 일? 스스로 자신의 토대로 허물도 다시 태어나는 죽음과 재생의 과정

이길 수 없는 영원한 전쟁? 테러와의 전쟁? 거기엔 실제로 적이 없다! “있지도 않은 테러범들을 동굴에서 찾는 걸 보게 될 거야”(아론 루소와 니콜라스 록펠러)

실제로 도덕은 기득권자의 무기이다. 도덕성 시비의 파멸을 피하고 엘리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자리가 증명체계의 바깥이자 학문과 지식의 바깥인 세속성이다

세속성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핵심이다.(현재가 살아있는 세속)

대의민주제, 대의성이 자신의 존립근거로서 요청하는 것이 전문성이다. 사람들의 뜻(민의)을 무엇이 대표한다고 했을 때 그것에 전문성이 없다면 대표성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세속성은 문자가 아닌 말의 세계다…세속화는 대의민주제가 아닌, 저잣거리 또는 광장의 정치인 직접민주제를 지향한다. 세속화는 쉽게 말해서 광대정신이다. 광대는 풍자와 익살과 해학을 통해 관중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풍자 등 광대의 행위는 기본질서와 가치에 대한 격하이고 그 결과는 민중의 읏음이다….그런데 대중은 모범생이나 도덕 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파열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늘날, ‘학력/지식’으로 무장한 채 ‘증명의 의무’를 지고 자본주의와 싸우겠다는 것은 마치 자책골을 넣으려고 싸우려는 선수와 같다. 그럴수록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체는 풍성해진다.

#유토피아야말로 지옥이다
‘한 손에 총, 한 손에 성경’, 팍스로마나, 팍스브리태니커, 팍스아메리카나, 분란 없이 평화를 유지하는 식민지? 원래 그러하듯이 ‘평화 라는 단어도 어떤 목적으로 쓰이냐에 따라 이처럼 달라진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쯤 되면 몇백 년 뒤를 내다본, 미국의 국가 건설 마스터플랜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이 마스터플랜은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일 뿐 아니라 과거 백인들의 인디언 침략사이기도 하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 부제가 붙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책을 보면 전율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이룰 수 없는 미래의 공상’이 아니라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돈과 같은 것이다. 돈(빚/신용)은 현재 돌고 있지만,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현재를 살 수 없게 한다.

전쟁은 언젠나 평화를 명분으로 한다…한편으로, 세계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힘도 유토피아다. 시민들은 유토피아의 형이상학이 아로새겨진 돈(빚/신용)의 위력 속에서 하루하루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거대담론의 대상이자 일상이 문제다.
이 같은 유토피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유토피아에 박탈당한 현재를 되찾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유토피아는 미래의 천국을 빌미로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종교가 번성하는 토양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무생물은 잘못된 개념이다. 만물은 다 생명이다-은 현재를 산다!!!

현대는 타자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다? ‘아마존 정글 원주민과 식물(정령)의 소통 이야기, 합리적 지식’이 가로막고 있을 뿐, 그것은 ‘실재하는 세계’였다! 이 세계야말로 타자와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세계다. 이 ‘실재하는 낙원’을 미신이라고 해서 퇴치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유토피아를 향해 스스로 노예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을 어찌 지옥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사 속으로 동시에 역사 밖으로
언어를 이용한 상징조작이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농간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 자본주의도 이 농간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사회에서 대중은 점점 이기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게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극소수 지배자가 만들어낸 최고의 성과물이다. 대중의 이기심을 이용하지 않고는 대중을 이처럼 자발적인 노예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전방위로 대중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실 속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살려고 할수록 소시민들은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화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이것을 막지 않으면 시대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 된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태어날 후손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고 있다.

유토피아가 보여줄 미래의 모습? 전 세계의 인디언 보호구역화(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지구촌 감시체제(조지 오웰의 [1984년])/벌레의 삶을 살게 될 개인(카프카의 [변신])
지금이 유일한 마지막 기회? 극소수의 세계지배자들도 바로 지금 마지막 공정만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마침내 유토피아가 도래한다. 그것이 곧 종말이다! (허울뿐인 미래)

인문학 콘서트 1 | 인문학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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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콘서트 1. p381

인간주의 에토스로 돌아가라!
그러한 미래 창조의 길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긴요한 자질은 우리의 심성과 욕구체계와 생활태도와 사회구조와 조직의 원리 모두에서 유연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어떤 상황에 닥치든지 적응하고 대처하면서 언제나 새로이 창조하는 슬기를 가질 수 있다.
이 유연성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준 노자는 유연하고 약한 것이 살아 있는 상태도, 굳고 강하면 실은 죽은 것이라 하였다. 그의 명언 한 구절만 소개함으로써 마무리한다.-[현대의 사회학,김경동]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하다. 초목도 살았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말라 굳어버린다. 그러므로 유약함은 삶의 현상이요, 굳고 강함은 죽음의 현상이다.”

무용지대용! 인문학이 언뜻 보기에는 무용지물처럼 보이지만, 무용지대용, 즉 무용한 듯이 보이지만 큰 쓰임이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섭? 통합은 물리적이고, 융합은 화학적이고, 통섭은 그냥 거기 섞여 있는 상태로, 녹아 있는 상태로 멈춘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뭔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번식하는, 생물학적인 어떤 합침을 의미하는 거지요. 이건 생물학의 근본 속성과도 아주 잘 어울려요.

미래 세대는 통섭적으로 함께 노력하는 다른 분야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해밀튼 박사

진화의 다른 말은 한마디로 ‘다양화’다. 태초의 바다에서 어느 날 우연히 태어난 DNA라는 묘한 화학물질이 그동안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이룩해 놓은 것이 바로 오늘날 이 엄청난 생물의 다양성이다. -최재천, [열대예찬]

나무만 보지 말고 숲 전체를 보고 그 변화를 보자. 세월에 따라 변하는 모습, 계절따라 변하는 색깔, 이런 것들을 모두 벌 줄 알아야하지, 하나만 파고들어서 되겠느냐

소유의 종말 시대, 인간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자산? 시간!(에디슨)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시간이다

상상부터 하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현장에 있는 리더! 리더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창조적 상상력도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 현장에서 몸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 안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에 요구되는 변화? 우선,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꾸 남에게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남을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이 내가 누군가를 모릅니다!

한쪽 귀는 꽉 막히고 다른 쪽 귀는 너무 크기 열린 사람? 요즘 어머니들! 자식에겐 귀를 꽉 닫고, 주변 뜬소문에 귀를 활짝

앎과 삶을 구분하고, 앎에 너무 치우친 교육 현실
공부 열심히 해서 일제에 봉사한 꼴(난득호도)

근본적 문제? 우리나나에서는 교육이 너무 ‘중요하다’는 겁니다! 신분 변환이 가능하기 때문

진짜 공부! 공부에 질린 아이는 성공할 수 없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게 뒷받침하는 게 진짜 공부이며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집어넣지 말고 끄집어 내라
오히려 천천히 가야 목적지에 더 일찍 도착한다

우리 아이는 남의 아이하고 다르다. 우리 아이의 다른 점을 부모가 알아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나, 하는 생각으로 아이를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_정진홍
문화의 다양성? 인간의 경험에 비롯된 시간과 공간에 따른 고유한 특성을 가진 현상이다!

종교?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현상, 인간이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열린 해답!
열린 해답? 삶을 정태적이지 않고 항상 변화한다!
종교 언어? “내가 너를 가르치는 것은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다.”-[싯다르타,헤르만 헤세]
못생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친구? 사랑의 언어! 사실을 서술하는 언어라면 모두 거짓말! 경험을 통한 체험한 해답의 고백, 고백이 만들어 놓은 현실, 그게 종교 언어!
그런데 그것을 현실로 여기고 현실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거죠.

설명의 언어가 아닌 고백하는 언어, 일상의 범주를 넘어선 시적 발상!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구현한 것이 비로 시(시의 필요성, 종교의 필요성)
인간이 직면한 문제는 몸의 현실에서 비롯됩니다

앎과 믿음은 서로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 앎의 우리에게 정직한 자세를 갖추게, 믿음은 우리에게 감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둘은 늘 함께 있어야 한다.

세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세 살 때 우리는 부모의 무릎에 있다, 부모가 최상의 교사다!
논리 교육을 받으면 아이들이 윤리적으로 변한다? 논리적 일관성을 잃으면 윤리적으로도 곧바로 문제가 생긴다!

남자의 권력, 여성의 성적매략이라는 게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유통기간이 아주 짧다

두려움 없이 사랑하라? 그 사랑을 통해서 자기 삶을 온전히 긍정할 힘을 얻어라!

윤리적 선택은 나보다 집단을 먼저 생각하는 의지의 작용

#온생명으로 태어나다_장회익
생명이 도대체 뭐냐? 생명체 내부를 구성하는 것과 생명체 외부 곧 환경을 구성하는 것이 서로 별개가 아니다! 이들이 함께 관련을 맺을 때 생명현상이 발생한다
전체 나무, 모두 연결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생명은-요노시 히로시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결이 안 되는
만들어짐의 과정.

꽃도
암꽃술과 수술로 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벌레나 바람이 찾아와
암꽃술과 수술을 연결하는 것.

생명은
제 안에 결여를 안고
그것을 타자가 채워 주는 것.

환경에 긍정과 부정적 요인을 갖는 인간 존재의 이중성? 문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필요. 그런 이해가 없기에 인간은 온생명안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겁니다
물질과 정신의 세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 외면적으로 나타나느냐 내면적으로 나타나느냐의 여부

앎이 삶의 즐거움이 되는 경지에 이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삶이 즐겁고 공부가 즐거워야 앎을 얻을 수 있다

#왜 ‘책’이어야 하는가_도정일
책읽는 사회‘ 설립취지?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자!
인문학의 쓸모? ‘쓸모’라고 생각되는 것 바깥의 쓸못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인문학적 관심은 ‘사람답게’ 살려는 요구에서 비롯된 것

몰가치 사회의 도래? 역할 모델을 보면 압니다! 우선 나부터 성공하고 보자는 추세가 지배적이다
디지털 문명의 경계해야할 가장 큰 위험? 거대한 감시와 통제 체제, 빅브라더
감시와 통제의 주체가 국가를 벗어나 사회 구성원 개개인일 수도 있다

인간의 네 가지 고유 능력? 기억하는, 생각하는, 상상하는, 표현하는 능력

인간이 기억과 사유와 상상의 능력을 가장 잘 고양하고 개발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한 매체가 바로 책입니다

책의 미래? 현재의 디지털 매체는 우리 시각을 덜 자극하고, 사유를 허용하며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안정된 매체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미지는 상상을 죽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독서 활동의 대표적 매체는 여전히 책이 될 것이고, 이 조건에 급격한 변화를 도입할 수는 없으리라는 봅니다.

“어떤 사회도 공동체적 성격을 갖지 않고서는 사람과 사람을 따뜻하게 이어주는 인간의 사회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에 풍비박산 나는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요. 어떤 가치의 공유에 의한 결속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어요…그래서 저는 근년 지역사회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공동체 복구’ 운동이 아주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것은 도시지역이건 시골이건 대차가 없습니다.”-[전환의 모색,도정일]

공동체적 가치가 더 나은 미래 사회의 단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어떤 사회에 하루 싶은가?”,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판 옵티콘, 그 안의 권력_박정자
시선은 권력의 표상이자 도구, 시선의 권력을 자각할 수 있는 현상?
대상은 곧 물건! 인간은 사물화하는 시선이 바로 불편함, 공포감의 원천
제레미 벤담의 판 옵티콘의 특징? 시선의 비대칭성
공개처형에서 감옥으로? 인도주의적 전환이 아닌 권력의 전략수정!(미쉘 푸코, 감시와 처벌)

“현대의 군주에게 시선은 공간도, 시간도 제한이 없다. 그래서 거대한 유리집안의 군주는 감시하느라 잠을 설칠 필요도 없다. 언제고 마음 내킬 때 저장된다 파일을 열어보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이 군준, 이 권력은 도대체 누구인가? 국가 권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익명의 권력,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이나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에 우리 시대의 미스터리가 있다”-[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

#유토피아를 꿈꾸다
현실에 없는 곳
“사실, 현대 세계에서 우세를 점한 사회제도를 생각해 볼 때, 저는 그것이 사회를 조직한다는 핑계로 부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늘리려는 음모 외에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선 부당하게 취득한 자신들의 이익을 안전하게 지켜나가기 위해, 그리고 가능한 값싸게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사서 착취하려고 온갖 종류의 속임수와 편법들을 생각해 내고 있습니다.”-[유토피아,토머스 모어]

디지털 기술개발의 미래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섭니다. 지난 세기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수단이었던 기술이 목적이 되어 버린 사회의 위험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누구나 이상적인 목적은 세울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말하기는 참 어렵죠.

예를 들어 자유를 너무 강조하면 결과적으로 서로 경쟁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에서 불평등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현대문명을 창조한 두 축? 인문적 상상력과 과학의 힘
아무리 과학만능의 시대가 도래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과학을 이끌어가는 인문적 상상력임을 새롭게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하라 | doing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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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p86
INDIGNEZ-VOUS!

1994년 3월 15일,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 개혁안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 방도를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퇴직연금제도….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이 이러한 원칙과 가치들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 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

#레지스탕스의 동기, 그것은 분노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런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사르트르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
복잡해진 세상, 상호의존적 세계, 강력한 상호연결성,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은 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제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보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비폭력, 우리가 가야 할 길
미래는 비폭력의 시대, 비폭력이라는 길을 통해 인류는 다음 단계로 건너가야 한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평화적 봉기를 위하여
서양인들의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은 세계를 위기로 이끌었으며,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면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94세 고령의 강건함과 용기의 비결? 나의 비결, 그것은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잘 되어가는 사회란?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 세 단어로 ‘자유,평등,박애’!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 이 가치들이 더욱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을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참 어려운 구축작업입니다.

‘창조적 저항의식’이 실천방법? 참여! 정당 지지, 투표, 참여 민주주의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_조국
공적인 분노, 세상의 진보는 불의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시민이 세상일에 관심을 끊거나 냉소르르보내면서 각자도생의 길을 걸을 때 세상의 불의는 승승장구하며 확대 재생되기 마련이다.

“분노할 일을 넘겨버리지 말라. 찾아서 분노하고 참여하여,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라”
‘어느 누구라도 인간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한창 피가 끓는 젊은이의 외침이 아니다. 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목소리다. 보편적인 권리, 기본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부디 분노하라고. 감정적인 외침이 아니라 ‘참여의 의지’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는 결기 어린 외침이다!

레지스탕스 정신은 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라

…사랑은 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가버린다
삶은 어찌 이리 느리며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