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우주. 미치오 카쿠. p251
#아인슈타인의 유산에 대한 새 시각
나아가 아인슈타인의 ‘실수’까지도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한 심오한 기여을 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2001년에 천문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최대 실수로 여겨졌던 ‘우주상수’가 실제로는 우주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우주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데 대한 믿을 만한 증거를 찾아냈다. 따라서 실험적 측면에서 보자면 아인슈타인의 예측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쌓여 감에 따라 그가 남긴 유산의 르네상스가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아인슈타인은 가끔씩 어떤 새 이론이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물리적 이미지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만물의 이론? ‘통일장이론’을 낳게 할 그림을 얻지 못한 이야기. 만일 이런 그림을 얻었다면 아인슈타인은 물질과 에너지에 관한 2천 년에 이르는 탐사에 찬란한 성과를 올려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아인슈타인의 직관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원자핵과 아원자입자들을 지배하는 힘들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통일장이론과 생애의 남은 30년? 그러나 지난 십여 년 사이, ‘초끈이론’이나 ‘M-이론’이라 불리는 것들이 나타나 통일장이론이 물리학계의 중심무대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만년에 했던 연구와 그의 유산들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물리학
맥스웰.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전기와 자기의 신비로운 힘을 설명하기 위하여 빛에 대한 이론을 개발했는데, 그 기초는 뉴턴의 힘이 아니라 ‘장Field’이라는 새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장의 개념에 대해 “뉴턴 이래 물리학이 알게 된 가장 심오하고도 풍요로운 개념”이라고 썼다.
이런 장들은 뉴턴이 도입했던 힘들과 사뭇 다르다. 뉴턴의 힘은 공간을 통해 즉시 전달,전기와 자기의 효과는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뉴턴역학과 매스웰의 이론을 결합하려는 시도마다 실패로 끝난다는 점이었다.
1900년이 되자 뉴턴역학의 결함은 갈수록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바야흐로 세계는 혁명을 맞을 채비가 되었는데, 과연 누가 이끌 것인가? 다른 많은 물리학자들은 에테르이론의 구멍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소심스레 뉴턴적 체계 안에서 적당히 땜질만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문제의 핵심을 공격할 수 있었다.
뉴턴의 ‘힘’과 맥스웰의 ‘장’은 융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두 기둥 중 하나는 쓰러져야 한다. 이런 사태가 오면 200여 년을 이어 온 물리학은 붕괴되고 우주와 현실 자체를 보는 관점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단순한 그림을 통해 뉴턴의 물리학을 뒤엎었다.
#어린 시절
우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완전히 새로 바꾼 인물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작은 도시 울름Ulm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권위주의적 방법이 그에게 남긴 상처를 쓰라린 마음으로 어루만지곤 했다
“사실 신성함 호기심이 그 현대적 교육법에 의해 완전히 말살당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이 연약한 작은 싹은, 자극은 제쳐 놓고, 우선 주로 자유로부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권위주의에 대해 그가 보인 첫 거부 반응은 그대로 마음속에서 새겨져 평생 동안 드러나는 성격상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이후 어떤 권위자의 말이라도 아인슈타인이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성경에서 보는 종교적 이야기들이 과학과 합치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지만, 우주에는 과학의 손길이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도 함께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람은 과학과 인간의 사고가 갖는 근원적 한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나침판과 과학과 종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른 관심은 그가 품은 아이디어들을 잘 가다듬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시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가난한 의학공부 학생 막스 탈무트는 매주 아인슈타인의 집에서 식사를 함께 했는데, 메마르고 기계적인 방식을 벗어나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의 경이로움을 올바로 소개해 주었다.
모든 것을 물리적 그림으로 바꿔 보는 능력은 물리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이 가진 위대한 장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환상의 달리기? 그는 빛줄기와 함께 달리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운명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때 빛은 어떻게 보일까?” 돌을 던지는 상상을 통해 지구에 대한 달의 공전을 시각화했던 뉴턴의 시도처럼 빛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 시도 또한 깊고도 놀라운 귀결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을 과학혁명의 직전 단계까지 끌어올린 것은 어떤 현상의 배후에 숨은 핵심원리를 분리하고 그 본질적인 그림에 집중하는 능력 바로 그것이었다. 많은 열등한 과학자들은 자주 복잡한 수학에 빠져 헤매지만 아인슈타인은 달리는 기차, 떨어지는 엘리에이터, 로켓, 움직이는 시계 등과 같은 단순한 물리적 그림을 통해 생각했다…그는 “모든 물리 이론들은 수학적 표현과 상관없이 어린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한 묘사로 설명되어야 한다”라고 썼다.
이제 더 이상 가라앉을 데도 없을 것 같던 구렁텅이에서 헤매던 때 예상치 못한 곳으로부터 드디어 운이 찾아왔다? 베른특허국의 말단 사원직.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낮은 지위에서 세상을 바꾸게 된다.
로렌츠-피츠제럴드수축. 아인슈타인이 보기에 기적과도 같은 성질을 가진 에테르의 개념은 너무 인공적이고 작위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아인슈타인도 오컴의 면도날(현상을 될 수 있는 한 적은 수의 원리로 설명하는 게 좋다)을 써서 에테르이론을 둘러싼 수많은 가식적 요소들을 밀어 버리고자 했으며, 이를 위하여 그는 어린이도 알 수 있는 그림을 사용했다.
#특수상대성과 ‘기적의 해’
과속차를 쫓아가는 경찰차를 상상해보자.
뉴턴의 그림(속도는 더해지거나 빼질 수 있다)과 맥스웰의 그림(빛의 속도는 상수)은 정면으로 모순된다. 뉴턴의 이론은 몇 가지 가정 위에서 세워진 일관된 체계. 따라서 그중 한 가정이라도 바뀌면 이론 전체가 허물어진다. 이는 마치 스웨터의 실 한 올만 잡아당겨도 스웨터 전부가 풀어지는 것과 같은데, 이 실마리가 바로 빛과 나란히 달려 본다는 아인슈타인의 몽상이었다.
뉴턴의 절대시간? 시간은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에 따라 우주의 곳곳마다 서로 다르게 진행할 수 있다!
동시성의 개념을 유연한 형태로 재편함으로써 나는 특수상대성이론에 이르게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관성계에서 성립하는 단 두 가지의 단순한 가정들로부터 모든 결론을 이끌어 냈다
1) 물리법칙은 모든 관성계에서 동일하다
2) 광속은 모든 관성계에서 일정하다
고전물리학은 특수상대성이론 때문에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어야 했다…에너지 보존 법칙? 이제는 물질과 에너지를 결합한 총량이 보존된다고 말해야 한다!
기적의 해? 뉴턴물리학의 체계를 뒤엎은 것으로 마무리지었으며, 이 업적들 낱낱만으로도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데에 실망했다. 그의 업적들은 완전히 무시당한 듯싶었으며, 이에 실망한 그는 다시 개인 생활로 돌아가 아이를 키우고 특허국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 몰두했다.
#빅뱅과 블랙홀
중력파
##합친 그림: 통일장이론
#통일과 양자 문제
순수한 구슬의 이론을 개발하고, 나무는 구슬의 이론만으로 재구성하여 제거하면 된다. 나무 자체가 구슬로 이뤄진 것으로 표현될 수 있으면 결국 기하학적 이론만 남게 된다…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일한 확고한 대칭성과 원리가 없다는 사실. 일찍이 보았듯, 아인슈타인적 사고의 핵심은 대칭성을 통한 통일이었다.
감춰진 차원이 있다면 어떤 원자의 크기보다 훨씬 더 작아야 한다. 이 새 이론에서 다섯째 차원을 원자보다 훨씬 더 작게 만든다면 지금까지 어떤 실험도 이 다섯째 차원을 검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도 별문제가 없는 셈이다. 이에 칼루자와 클라인은 다섯째 차원이 실험적으로 도저히 검출될 수 없을 정도의 극히 작은 공 속에 곱슬머리 모양으로 감겨져 있다고 가정했다.
상대론은 뉴턴의 이론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더 큰 이론 속으로 합류시켰다. 따라서 뉴턴역학은 나름의 특별한 영역, 곧 질량이 크고 속도가 느린 대상들에 대해서는 아주 타당하다.
#전쟁과 평화와 E=mc2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이 아니라 통일장이론을 연구했기 때문에 고등과학원의 주된 연구 흐름으로부터 고립되어 감을 깨달았다…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물리학자들은 그가 전성기를 지나 시대에 뒤쳐진다고 수군댔지만 이를 개의치 않은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세월이 눈을 흐리고 귀를 가늘게 한 탓에 대체로 돌처럼 생기를 잃은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천서이 이에 어울렸던지, 이런 배역이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프린스턴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지냈던 아인슈타인이었지만 블랙홀과 중력파와 기타 다른 현상들에 이르기까지 현대 우주론의 여러 새 길들이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것을 볼정도로 충분히 오래 살았다.
미켈란 베소의 사망 소식. “…그는 기묘한 세상을 떠나는 데에도 다시 나보다 조금 앞섰네. 물론 이는 아무 의미도 없어. 물리학을 믿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구분은, 아무리 끈질긴 것이라도, 오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말일세.”
#아인슈타인의 예언적 유산
물질들에 대한 수많은 ‘쉬운’ 문제들은 깨끗이 해결되어 온 반면 아인슈타인이 제기했던 훨씬 ‘어려운’ 문제들을 아직 해답을 모른 채 남아 있다.
끝으로 아인슈타인을 어떻게 재평가해야 할까? 1925년 이후에는 차라리 낚시나 하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헌사를 드리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물리학의 모든 지식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의 양대 기둥에 근거한다. 아인슈타인은 전자이 창설자였고 후자의 대부였으며, 이 둘의 통합에 이를 수도 있는 길을 닦았다.”